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중국사상 유의(劉毅)라는 동명이인이 등장한다. 한 사람은 자가 희락(希樂)으로 동진 말기에 재승박덕으로 분에 넘치는 욕심을 부리다가 망했고, 한 사람은 자가 중웅(仲雄)으로 동한 말기에서 서진 초기의 명신이었다. 중웅은 산동성 내주 출신으로 서한 성양경왕 유장(劉章)의 후손이다. 오늘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중웅은 인물 평가를 좋아했다. 왕공귀족들은 본색이 드러날까 두려워 그를 피했다. 평양에 살 때 태수 두서(杜恕)가 공조로 불렀다. 부임한 후 군리 100여명을 도태시키자, 사람들이 모두 그를 칭찬했다.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삼국시대를 마무리한 사마씨의 서진은 내분으로 단명했다. 창업군주 사마염(司馬炎)이 멍청이 사마충(司馬充)을 후계자로 삼았기 때문에 혈족끼리의 내분이 발생했다. 용병으로 참여한 북방민족이 중원에서 세력을 떨쳤다. ‘오호십육국시대’라는 전대미문의 군웅할거시대가 300년 이상 계속됐다. 혼란의 시대라지만 관점을 달리 보면 다양한 민족과 인물들이 각자의 문화와 기량을 시험한 기회의 시대이기도 했다. 유곤(劉琨)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서한 중산정왕(中山靖王) 유승(劉勝)의 후예라 하니 삼국지의 주인공 유비(劉備)와 동
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전제정치의 가장 큰 결함은 군주의 선택이다. 제왕의 집안에 태어난 현명한 사람도 군주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제왕의 아들이 모두 현명하다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지극히 다행이다. 그렇지 못하면 나라와 백성은 불구덩이에 빠진다. 특히 적장자의 능력 여부는 나라와 백성들에게 생사가 달린 문제였다. 왕조와 군주의 교체가 있을 때마다 분쟁이 발생했고, 권신들은 이해관계에 따라 새로운 군주를 옹립했다. 군주의 폐립은 국가나 백성들을 위한다는 명분을 앞세우고 시작된다. 그러나 핵심은 자신의 생명과 가문의 운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