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절을 앞두고, 부스러기사랑나눔회가 경북 문경시 산골마을에 산타나들이를 간다는 제보를 받고 본 기자도 함께 동참키로 했다. 21일 오후 2시경, 문경읍터미널에서 두 명의 산타를 만날 수 있었다. 차안에는 아이들손에 쥐어지게 될 선물이 가득했는데 그 중 동화책에서나 봄직한 과자로 만든 예쁜 집이 한눈에 들어왔다. “서울국제학교(성남 외국인 학교) 전교생이 부모님들 구두를 닦고 심부름을 하면서 모은 돈으로 직접 만든 과자집과 선물들이예요, 이쁘기도 하지만 정말 정성이예요. 정성…”마을로 들어서기까지 여기저기 눈덮힌 산과 도로 옆을 지
본지는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양대 산맥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CCK)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의 태동과정과 그동안 성명서를 통해 밝힌 양 단체의 입장을 간단히 정리해봤다. 또한 이들 단체가 위기를 맞은 한국교회를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이며,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조명해봤다. 한국교회는 1984년 선교100주년을 맞아 교파를 초월해 성대한 기념행사를 치렀다. 이후 대회에 참석했던 교계 원로들은 진보와 보수를 아울러 한목소리를 낼 수 있는 단체가 필요함을 인식하게 됐다. 이러한 교계의 분위기 속에 1989년 1월2일 교
기독교는 유일신 창조주 하나님을 아버지로 인정하고 예수님의 보혈로 인류의 죄가 대속됐음을 인정하는 종교를 두고 말한다. 본래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그 선민 유대인들과 함께했던 것이었으나 성경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음으로 이방인들인 세계 각 민족에게 기회가 넘어간 것에서 한국교회의 역사도 포함된다 할 수 있다.한국기독교사는 이런 맥락에서 120년이라는 짧은 역사지만 세계교회사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부흥을 이뤘으며 타고르는 한국을 ‘동방의 등불’이라 부르기도 했다. 한국에서 기독교가 행했던
성결의 정의와 한국성결교회의 효시론 스미스 박사는 제5회 카우만 기념강좌에서 ‘성결’에 대한 정의를 “성령을 통한 죄에서의 해방과 자유”라 하고 ‘성결운동’에 대해서는 “인간의 능력을 넘어 성령의 능력으로 새로운 사회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성결교회 교리의 원조는 요한 웨슬레이다. 요한 웨슬레가 산업혁명의 격류 속에서 도덕적, 종교적으로 부패한 18세기의 영국사회를 정상화시키면서 태동한 감리교회를 통해 미국사회도 변화의 물결이 일어나 많은 부흥강사를 배출시켰는데 그 중 무디(D.L.Moody)가 가장 유명하다. 무디의
본지는 작년 9월 이단경계주간을 기점으로 지금까지 한국교회와 성도들에게 ‘이단과 정통’에 대한 올바른 기준을 세워주기 위해 기획을 진행해왔다. 또한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저널리스트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해왔으며, 이단과 정통의 기준은 오직 성경밖에 없음을 천명해왔다. 이에 요즘 한국교회 안팎으로 커다란 이슈가 되고 있는 이단감별사와 그들의 이단감별 기준에 대해 그리고 자칭 이단감별사로 하여금 이단시 된 교단에 대한 특별기획을 마련했다.지면을 통해서나마 한국교회에 적잖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이단감별사들의 행적과 과연
은둔의 나라에 복음의 빛을 비춰 잠자던 영성을 깨운 감리교단은 한국교회사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우리는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의 태동과 변천사를 살펴보며 그동안 많은 발전을 이루어 2007년 현재 교회수가 5,825개에 이르고 교역자 8,930명 그리고 153만여명의 성도로 성장하게 된 배경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기독교대한감리회의 태동 1870∼1880년대 새로운 사상과 종교를 갈망하는 한국인들은 만주와 일본에서 기독교 복음을 접하고 성서를 우리말로 번역하였다. 이들이 해외에서 출판한 한글 성서들은 매서인을 통해 국내에 들여
교회사를 보면 초대교회 이래로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어 가는 과정 중에 교파(敎派)의 분열은 피할 수 없는 과정이었다. 본래는 하나이던 것이 세포분열을 하듯 둘이 되고 넷이 되고 그렇게 기하급수적으로 분파되고 갈라지게 된 것에는 하나님보다 높아지려는 인간의 욕심이 내재되어 있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던 많은 일들이 결국에는 자신들의 욕심을 채우기 위함임을 지나온 역사를 통해 알 수 있었다. 이러한 분열의 과정 중에 생겨난 것이 바로 지금의 교단과 교파로 비록 각자가 다른 교단에 속했지만 하루속히 여러 갈래로 갈라진 교단과
한국은 19세기 말에서야 복음이 전해진 예수님이 오신지 2000년이 가깝도록 이방이라는 어두운 지역이었다. 이렇듯 개신교의 한국전래가 늦어진 배경을 놓고 말들이 많지만 결국 정치적, 문화적 이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불가해한 섭리를 들 수 있다.사실 개신교 이전에 천주교가 먼저 실학사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처음으로 서학이라는 이유로 수용됐지만 이는 종교라는 의미보다 서양의 학문을 사모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실학자 중에 처음으로 가톨릭 신자가 된 사람은 이승훈으로 한국에 개신교가 들어오기 100년 전인 북경에
은둔의 나라에 복음의 빛을 비춰 잠자던 영성을 깨운 감리교단은 한국교회사에 있어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우리는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의 태동과 변천사를 살펴보며 그동안 많은 발전을 이루어 2007년 현재 교회수가 5,825개에 이르고 교역자 8,930명 그리고 153만여명의 성도로 성장하게 된 배경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기독교대한감리회의 태동 1870∼1880년대 새로운 사상과 종교를 갈망하는 한국인들은 만주와 일본에서 기독교 복음을 접하고 성서를 우리말로 번역하였다. 이들이 해외에서 출판한 한글 성서들은 매서인을 통해 국내에
평범한 삶을 살아오다가 인생의 막다른 길로 내몰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길거리 생활을 하는 사람을 우리는‘노숙자’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1990년대 말에 찾아온 국제통화기금(IMF)의 관리를 받게 된 이후로 수많은 실직자들이 노숙자로 전락되고 말았다. 이에 노숙자를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편견과 부정적인 인식이 대부분이었으나 최근에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회복지의 대상으로 변화되고 있다. 특히, IMF 이후 실직 및 경제적인 이유로 생겨난 노숙자들에게는 자활하려는 의지가 강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에 본지는 2주년
오랜 갈등과 시련, 고난과 박해를 받고 있던 초대교회는 313년 동방의 리카리우스와 서방의 콘스탄티누스 황제 사이에 맺어진 ‘밀라노 칙령’에 의해 활력을 받게 되고 최대의 자유를 맞게 된다. 니케아회의를 통해 삼위일체 교리가 정리되고 삼위일체 교리가 기독교 신앙의 근본항목이 되었으며, 451년 칼케톤에서 진행된 제3차 종교회의에서는 교회가 그리스도를 완전한 신성의 하나님이시오 완전한 인성을 가진 참 사람으로 인정하고 신앙할 것을 결의했다. 종교회의를 통해 복음 증거의 탄력을 받아 많은 부흥을 하였지만 이때 정해진 사도신경은 세례문답
한국에 개신교가 전래된 시점의 국내 상황은 국운의 쇠함과 불교나 유교에 대한 허탈감을 들 수 있으며 학자들은 이 시기를 종교적 공백기라 부른다.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교회의 역사는 1816년 영국 정부가 중국에 파송하는 윌리암이라는 군함이 서해안을 탐사하라는 명령을 받고 마량진 앞에서 문정의 임무를 띤 첨사 조대복에게 바실홀이라는 사절이 성경을 준 것을 기원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1832년에는 칼 큐츠라프(Karl Guetzlaff)라는 네덜란드 소속 선교사가 최초로 황해도와 백령도를 거쳐 원산도에 도착해 홍주 목사 이민회를 통해 왕
누가 정통과 이단을 논할 수 있는가종교개혁의 중심에 선 칼빈도 정통은 아니다. 부패와 타락의 온상으로 변해버린 가톨릭에 하나님께서 계실 수 없다는 것을 뼈져리게 느끼고 수도자이자 신학자였던 루터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는 취지로 종교개혁을 감행했다. 이후 변화의 물결은 전 유럽으로 유행처럼 퍼져 나갔으며 그 중 괄목할 만한 이가 있었으니 칼빈이라는 신학자였다. 누구보다 모범적이며 열심을 다한 기독교인-칼빈 장로교의 시조라 할 수 있는 칼빈에 대해 그의 수제자 베자가 쓴 전기에서는 대부분의 생애를 이단과 투쟁하면서 보낸 모범적인 교인으로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독일의 성직자·성서학자인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이이스레벤에서 태어났다. 그는 만스펠트, 마그데부르크, 아이제나하 등에서 초등교육을 마치고 1501년 에르푸르트(Erfurt) 대학에 입학했다. 이후 부모가 원했던 법률을 공부했지만 낙뢰사건으로 삶의 방향을 바꾸어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 생활을 하면서 1507년 성직자가 되었다. 그는 비텐베르크대학에서 신학 학위도 받고 시편, 로마서, 히브리서 등을 강의했다. 그는 수도원생활을 하면서 경건과 헌신에 열심 있는 사람으로 평판을 받
서로마의 멸망으로 제국의 통일이 무너지고 제후들이 부상하면서 봉건제도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를 기초로 교황권과 수도원이 제도적으로 안정되었으나 정치와 신학적인 분열로 동서방 교회는 위기를 맞게 되었다. 중세 유럽의 기독교 형성 과정#1 중세는 476년 서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시작되었지만 중세 교회와 문화적 전통과 언어 그리고 우월한 제도와 법률을 통해 정복자들의 의식 속에서 계속 계승되었다. 현대적 의미의 유럽을 형성시킨 것은 일차적으로 7~8세기 이슬람의 정복과 800년 12월에 시행된 샤를마뉴의 황제 대관식이었다. 이후 새로운
박해 속 뿌려진 복음, 정통신학의 정립? 초대교회사의 연대 구분은 외형적인 기간을 중심으로 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시점으로 AD 476년 서로마의 멸망까지이며, 내면적인 교회 역사 중심으로 할 때는 590년 그레고리 1세가 교황으로 즉위하기 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초대교회사 시기는 로마제국의 박해 아래 기독교가 필사적인 투쟁을 하며 발전했던 때이다. ▶ 64년 로마대화재 처음 30년 동안 로마당국은 기독교를 당시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을 받았던 유대교에서 갈라져 나온 신흥종교로 생각했다. 그러나 유대인들 중에 기독교인을 싫어하
초대교회사의 연대 구분은 외형적인 기간을 중심으로 할 때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시점으로 AD 476년 서로마의 멸망까지이며, 내면적인 교회 역사 중심으로 할 때는 590년 그레고리 1세가 교황으로 즉위하기 전까지의 기간을 말한다. 초대교회사 시기는 로마제국의 박해 아래 기독교가 필사적인 투쟁을 하며 발전했던 때이다.▶ 64년 로마대화재 처음 30년 동안 로마당국은 기독교를 당시 합법적인 종교로 인정을 받았던 유대교에서 갈라져 나온 신흥종교로 생각했다. 그러나 유대인들 중에 기독교인을 싫어하는 사람이 많아지고 심지어는 로마당국을 부추
감리교 삼남연회는 23일 부산아시아드주경기장에서 개최되는‘감리교 영남선교회’를 앞두고 영남크리스천기자협회 기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이날 장석재 총무, 정양희 목사, 박효섭 감리사, 최범순 목사, 방영식 목사가 참석, 행사 진행사항과 감리교의 입장을 밝히는 시간으로 마련됐다. Q. 오는 8월23일 부산 아시아드 경기장에서 전국의 감리교회가 모여서 영남선교대회를 개최하기로 되어있습니다. 전국에서 10만명이 집회에 참여할 예정인데, 부산에서 개최하는 이번 대회의 동기와 목적에 대해 소개 부탁드립니다. A. 장석재 총무 3년전에는 광주에
아담의 시대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과의 약속인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음으로 범죄하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이 둘이 생명나무 실과를 따먹고 영생할까하여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며, 에덴동산 동편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화염검을 두어 생명나무 길을 지키게 하신다. (창 3:22~24)아담과 하와에게 가인과 아벨이라 하는 아들 둘이 있었으나 후에 가인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제물을 열납하지 아니했다는 이유로 아우 아벨을 죽임.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이유는 가인이 악한 자(요일 3:12)에게 속했기 때문이
역사를 바로잡는다는 것은 개혁한다는 말과 같은 맥락이다. 지금까지 역사적 사실로 믿어왔던 사건이 거짓일 수도 있고, 조작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정치나 권력, 역사를 기술(記述)하는 사람의 생각이 개입되었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러 이유로 역사를 바로잡는다는 것은 때로는 희생을 동반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역사의 왜곡을 알면서도 혹은 의구심을 품으면서도 사람들은 선뜻 나서지 못한다.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다. 개혁(바로잡기)하기까지의 과정 속에 수많은 전쟁이 있더라도 바로 지금 누군가가 하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