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 교단의 뿌리를 찾아서 [장로교]편

한국은 19세기 말에서야 복음이 전해진 예수님이 오신지 2000년이 가깝도록 이방이라는 어두운 지역이었다. 이렇듯 개신교의 한국전래가 늦어진 배경을 놓고 말들이 많지만 결국 정치적, 문화적 이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불가해한 섭리를 들 수 있다.

사실 개신교 이전에 천주교가 먼저 실학사상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처음으로 서학이라는 이유로 수용됐지만 이는 종교라는 의미보다 서양의 학문을 사모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실학자 중에 처음으로 가톨릭 신자가 된 사람은 이승훈으로 한국에 개신교가 들어오기 100년 전인 북경에서 1784년 영세를 받았다.

개신교의 한국선교는 서구와 미주 양측으로부터 시작된다. 미주로부터 교회가 자리를 잡는 반면 벨트브레와 하멜이라는 화란 사람들이 한국 땅을 밟게 된다. 벨트브레는 1627년 동해안에 표류하다 경주에서 검거돼 한국에 영주하게 된 자로 탁월한 인품을 소유한 개신교인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 이름 박연으로 개명한 뒤 한국여인과 결혼한 뒤 1남2녀를 두고 한국군 발전에 상당한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하멜은 1653년 대만을 거쳐 일본을 향하던 화란 상선이 파선돼 60여명이 제주도에 억류돼 14년간 한국생활을 하게 된다. 그 중 한 사람이 하멜이라는 개신교 추정인이었다.

한국을 방문한 최초의 선교사는 칼 귀츠라프라였다. 1827년 인도네시아의 자바, 슈마트라에 선교사로 파송된 후 태국을 거쳐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황해도, 백령도 등 서해안으로 항해를 하면서 모리슨으로부터 얻은 한문성경을 이 때 한국 주민에게 배포를 하고 의약품을 나눠주거나 병을 고쳐주는 사역도 함께하게 된다.

귀츠라프라 선교사는 이명희와 김영순을 통해 국왕에게 성경과 교리서를 증정할 뿐 아니라 주기도문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등 40일간의 체류기간 동안 큰 공적을 남겼다.

귀츨라프라 선교사가 한국 서해안을 답사한 지 34년만인 1866년 스코틀랜드 토마스 목사가 대동강으로 입항하다 순교한다. 토마스 목사는 1865년 산동에서 선교를 하던 중 한국선교에 대한 뜻을 품고 있던 중 1868년 청진에서 제너럴 셔먼호를 타고 한국으로 입항했으나 배는 불에 타고 토마스 목사는 순교하게 된다. 당시 토마스 목사의 목을 벤 사람으로 알려진 박춘건에게 성경을 전했다는 말이 있지만 확실치는 않다.

한국 최초의 개신교 신자는 만주에서 탄생한다. 만주 땅에 고려문이라는 국제적 교역지가 당시 한국을 위한 선교의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던 곳으로 스코틀랜드 장로교 연합 자유교회의 목사였던 로스 목사가 1874년 고려문을 방문해 백홍준, 김진기 등 4인을 자기 숙소로 인도해 3년 뒤 세례를 주게 된다.

국외에서 한국 장로교회의 기지가 마련된 것으로 이들을 통해 한국말로 성경번역을 시작해 1887년 신약성경 전부가 인쇄됐으며 ‘예수성경전서’라는 이름으로 최초의 한국어 성경 3,000부가 출판돼 만주와 한국에 전해진다.

1881년 일본에서도 이수정이라는 자가 1833년 세례를 받은 후 일본 주재 미 성서공회 총무의 부탁으로 성경번역에 착수 1884년 마가복음 출판, 그 후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한국에 들어올 때 한국어로 번역된 성경을 들고 입국하는 계기가 됐다.

한국 최초의 교회는 만주에서 세례를 받은 백홍준 등이 고향 의주에서 전도한 후 몇 사람과 함께 자기의 집에서 예배하는 것으로 최초의 교회가 설립됐다.

이와함께 한국 최초의 교회당은 서상륜이라는 권서자에 의해 설립된다. 서상륜은 그의 동생 서경조와 10여명을 전도한 후 황해도 솔내로 옮겨 1885년에 8칸의 교회당을 건축하게 된다.

한국인 전도자에 의해 최초로 교회당이 설립된 이후 알렌과 언더우드 등이 한국에 입국해 선교활동을 폈으나 여전히 국법으로 종교가 금지돼 있던 시기인지라 개신교인이 되기 위해서라면 목숨을 걸 수 밖에 없는 위험천만한 당시 상황이었다.

1886년말 서상륜은 솔내교회 교인 셋을 데리고 언더우드를 찾았으며 언더우드는 이듬해인 1887년  봄 사형의 위험을 무릅쓰고 세례를 주게된다.

1887년에는 또 언더우드 선교사 집에서 예배를 드리던 것이 시초가 돼 새문안교회가 설립된다.
선교사들의 최초 선교방법은 한 곳에 정착해 그 지역만 복음화 하려는 것이 아닌 가능한 넓은 지역을 복음화하기 위한 전략으로 순회전도를 선택했다.

언더우드는 1889년 여의사 홀튼과 결혼한 뒤 신혼여행을 서울에서 송도를 거쳐 솔내, 평양,강계 등 약 1,000마일을 전도여행으로 대신했다. 언더우드는 전도여행 중 600명 치료와 100명이라는 세례인을 만들었다.

1885년 이후 경쟁을 막고 효과적 전도를 위해 국적과 교파가 다른 미국, 캐나다, 호주 등 선교사들의 선교지를 분할하게 됐다.

1889년 미북장로교회 선교회와 호주 장로교회 선교회 간 의논 후 남장로교가 들어오고 1893년 양 선교회(남북)가 협력하여 하나의 장로회를 세울 것을 협의, 전라·충청지방을 남장로교회가, 서울이나 서북지역을 북장로교회가, 낙동강 이남지역은 호주선교회, 낙동강 이북지역은 북장로교회가 담당하기로 결정한 후 한국교회가 조직을 갖추기 전까지 분할 치리하기로 결정했다.

이상의 4개 장로교 선교회는 한국장로교회의 창설을 신학교육, 문서사업에서 연합을 도모하기로 했다. 이들은 장로교공의회를 조직, 1901년에는 4개의 장로교회가 협동으로 연합장로교신학교(평양신학교)를 설립하게 됐다.

분열 원인, 사람의 샹각과 판단

장로교의 분열
한국교회 역사의 시작이라고도 볼 수 있는 장로교는 큰 교세를 자랑하기도 하지만 그 이면에는 수많은 분열의 아픔을 겪어 왔다.

특히, 한국장로교의 핵심적인 분열은 1940년대 후반부터 1950년대에 집중적으로 이뤄졌다.
분열의 큰 원인들로는 첫째는 신사참배 문제로 인한 분열, 둘째는 자유주의 신학노선의 입장 차이로 인한 분열, 셋째는 NAE와 WCC의 대립으로 인한 분열의 세가지 사건으로 나눌 수 있다.

이후에 수많은 장로교의 이름을 가진 교단과 교파가 형성되어 지금은 그 수를 정확히 헤아릴 수 없는 실정이다.

고신파의 분열
장로교는 일제로부터 해방이 된 후, 신사참배에 반대해 옥중생활을 했던 출옥파와 신사참배에 가결하고 일본에 굴복한 사람들이 주류를 이룬 친일파가 갈등을 빚고 있었다.

이런 대립과 갈등 속에 신사참배에 참여했던 자들이 형식적으로는 자숙을 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는 전혀 회개의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또한, 경남 노회에서는 교역자의 자숙을 재건 원칙으로 내세웠으나, 자신들도 지키지 못한 채 어영부영 넘어가려 했다. 

이에 반발한 출옥파들은 보수적인 장로교 신학으로 교육하는 신학교를 설립하기로 결정하고 신학교 설립 ‘기성회’를 조직했다. 경남 노회의 후원으로 박윤선을 주강사로 하는 신학강좌를 열고 박형룡을 교장으로 모시는 등 조선신학교에 반대하여 고려신학교를 세웠다.

하지만 고려신학교의 진로도 순탄치가 않았다. 교장이 된 박형룡은 교회재건운동은 총회와 노회를 기반으로 하여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상동은 고려신학교를 총회와는 독립된 학교로서 유지해 가려고 하였고, 결국 박형룡은 고려신학교를 떠났다(1948년 4월). 1948년 5월, 총회는 고려신학교와 장로교 총회와 아무 연관이 없음을 밝혔고, 9월 경남 노회는 고려신학교의 인가를 취소한다. 이에 고려신학교를 지지하는 파와 거부하는 파로 나뉘어 결국 경남 노회가 둘로 갈라진다. 결국 고려신학교를 지지한 경남 노회의 분파가 "고려파(고신파)"가 되어 장로교에서 분리됐다.

예장과 기장의 분열
1948년 8월에 박형룡 교장을 중심으로 개교된 장로회신학교가 1949년 총회에서 장로회신학교의 총회직영이 가결됨에 따라 총회 안에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 두 개가 공존하게 됐다.

당시 조신파(현재의 한국기독교장로회)의 신학적인 성향은 보수주의나 근본주의로 목회자를 양성해온 장로교에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에 따라 한경직 목사는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 합동위원회를 구성했으나, 이는 김재준 목사를 총회신학교에서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1951년 9월 ‘총회신학교’가 대구에서 개교됨으로써 장로회신학교는 폐교됐으나, 김재준 목사의 조선신학교는 이를 거부하고 신학교를 계속 운영했다.

1952년 총회는 장로교 신조 제1조에 어긋난 것을 가르치는 자를 경계한다는 결정을 내렸는데, 이것은 조선신학교의 김재준 목사를 겨냥한 것이었다. 1953년 4월 38회 총회에는 조선신학교 직영을 취소하고, 김재준 목사의 교수·목사직을 박탈 및 조선신학교 졸업생 교역자 채용을 불가할 것을 결의했다.

이로 인해 조선신학교 설립을 주도한 경기노회는 총회의 결정에 불복하고 1953년 6월 한신 대학(조선신학교의 바뀐 명칭)에서 38차 총회를 개최한 뒤, 1954년 6월 10일 ‘대한기독교장로회’라는 명칭으로 공식 출범하게 됐다.

통합과 합동의 분열
NAE계의 목사들이 WCC 용공적이라며 비난하고, 한국교회의 반공이념과 신앙의 순수성 보존을 위해 WCC에서 탈퇴할 것을 주장해 왔다. 결국 1959년 44차 대전중앙교회에서 열린 44차 총회에서 WCC문제로 논쟁이 과열돼 총회가 무산됐다.

이 당시 총회가 무산되자 WCC를 찬성하는 이들은 연동교회로, 반대하는 이들은 승동교회로 모여서 총회를 개최했는데, 연동측과 승동측으로 나뉜 후 통합과 합동교단으로 갈라서게 됐다.

이후에도 합동은 1962년 호헌파 분열, 성경장로회가 분열돼 나갔다. 1960년에는 고신측과 합동하였다가 1963년에 다시 분열됐고, 같은 해 개혁파교회 세계대회에 가입했다가 1972년 57회 총회에서 탈퇴를 결의했다. 1979년에는 합동이 다시 사당동파와 방배동파로 분열됐고, 이후에도 합동측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분열의 분열을 거듭했다.

고전1장 10절 이하를 보면 고린도 교회에서 분쟁이 일어나 바울에게, 아볼로에게, 게바에게, 그리스도에게 편을 가르며 서로 혼란스러워 할 때 바울은 누가 너희를 위해 십자가를 졌고, 누구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느냐며 호되게 질책했다.

고전3장 3절 이하에도 육신의 속한 자들이 서로 시기와 분쟁하여 서로 나뉜다고 했다. 이처럼 분열과 나뉨은 하나님의 뜻도 예수님이 바라시는 것도 아닌 사람의 생각과 판단으로 인해 나타난 결과이다.

하지만 올해 장로교는 큰 변화를 보이고 있다. 그것은 바로 ‘화해와 협력’의 길로 들어서고 있다는 점이다. 특히 올해 장로교는 평양대부흥1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가 연합해서 대규모 행사를 치룬 가운데 통합과 합동, 통합과 기장, 합동과 고신의 총회장들이 강단교류를 통해 형제애를 보였다는 점은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일시적이고 형식적인 이벤트는 진정한 화해와 협력을 더 나아가 완전히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온전히 하나가 되기 위해선 서로를 진리의 띠로 온전히 두를 때 가능하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장로교가 수많은 교단과 교파로 분열된 현 시점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하나가 되는 그 날이 속히 오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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