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경기도 화성의 융건릉에는 두 개의 합장릉이 있는데 추존 장조(사도세자)·헌경왕후(혜경궁)의 ‘융릉’과, 아들 정조·효의왕후의 ‘건릉’이다. 영조의 첫아들 효장세자가 9살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떴고 7년이 지나 영빈 이씨가 사도세자를 낳았다. 왕실의 경사였다. 세자 또한 아들을 보니 정조였다. 그러나 세자는 1762년 윤5월 임오화변으로 27세에 아버지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고 말았다. 영조는 사도세자라 칭했고 배봉산(현 서울 동대문구)에 묘를 조성하고 수은묘(垂恩墓)라 했다. 1776년 정조가 즉위해 아버지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파주 삼릉의 ‘영릉(永陵)’은 조선 제21대 왕 영조의 큰아들 추존 진종과 효순왕후 조씨의 쌍릉이다. 세종(英陵)과 효종(寧陵)의 능도 영릉이다. 영조는 두 명의 아들을 두었으니 후궁 정빈(이씨)이 효장세자(추존 진종)를, 영빈(이씨)이 사도세자(추존 장조)를 낳았다. 영조는 왕자(연잉군)시절 부인 서씨가 27세가 되도록 자식을 낳지 못하던 차에 1719년 후궁 정빈에게서 아들(효장세자)을 보았다. 이듬해 경종이 왕이 됐으나 즉위 4년 만에 승하하니 영조가 왕이 되었고 그 아들은 세자가 됐다. 그러나 9살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서오릉의 ‘홍릉’은 제21대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 서씨의 단릉이다. 원래 영조는 정성왕후의 옆자리에 묻히고자 허우제(무덤의 옆자리를 비워두는 방식)로 했으나 결국은 정순왕후와 함께 원릉에 묻혔다. 영조와 정성왕후는 왕과 왕비의 부부로서 33년이라는 최장기 기록을 세웠다. 정성왕후는 영조의 안정적인 국정운영에 한몫했으나 자식이 없었다.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탕평책을 펼쳤고 백성을 위한 다양한 정책으로 나라를 편하게 다스렸다. 정성왕후는 정비임에도 영조의 총애를 받지 못했으나 어질고 너그러워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동구릉의 원릉은 영조(조선 제21대 왕)와 정순왕후가 잠들어 있다. 영조는 후기 조선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친 왕이다. 영조는 51년이 넘는 세월을 왕위에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에도 불구하고 영조 이후 조선 왕실은 적장자는 물론 제대로 왕위를 이을 왕자를 찾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두 명의 왕후 정성왕후와 정순왕후는 자식이 없었으며 후궁 정빈이씨에게 첫 아들 효장세자가 있었으나 9살에 죽고 영조가 41세에 겨우 다시 아들을 보니 사도세자였다. 그러나 아버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으니 27세였다. 영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조선 왕릉에서 가을 정취가 아름다운 능의 하나가 바로 ‘의릉’이다. 서울 성북구 의릉은 경종과 선의왕후가 잠든 곳으로 효종과 인선왕후의 능처럼 왕과 왕후의 봉분이 위아래에 자리한 동원상하릉이다. 경종은 후궁-왕비-폐비-사사에 이르는 극적인 인생을 살았던 옥산부대빈 장씨, 즉 장희빈(이름은 장옥정)의 아들 아닌가. 단종, 인종과 더불어 조선왕으로서 가장 외롭고 힘든 삶을 살았다. 부모도 부인도 힘이 되어주지 못했고 자식도 없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내쳐져 목숨을 끊어야 했고 부인 둘은 20대에 일찍 죽었으며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숙종의 왕비는 4명이었다. 첫 왕비 인경왕후 김씨는 세상을 뜨고 1681(숙종 7)년에 경릉(추존 덕종) 근처의 '익릉'에 자리 잡았다. 13살에 왕비가 되어 후사도 없이 19살에 세상을 떴고 나홀로 능에 묻혔다. 후궁으로써 첫 왕자를 낳고 왕비에 올랐던 장희빈의 묘도 주변에 자리했다.첫 왕비 인경왕후와 마지막 왕비 인원왕후는 비교적 평안한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두 번째 부인 인현왕후와 세 번째 왕비였던 희빈장씨는 정치의 영향을 받아 왕비 책봉과 폐비가 되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결국 두명은 숙종과 명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고양 서오릉은 숙종과 그 부인, 며느리들이 함께 묻혀있다. 숙종과 인현왕후, 인원왕후(명릉), 인경왕후(익릉), 희빈 장씨(대빈묘)와 두 며느리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홍릉), 영조의 후궁이자 사도세자의 사친 정빈 이씨(수경원)가 능역에 자리하고 있다. 이처럼 동일구역 왕릉에 4명의 부인과 더불어 며느리까지 모여 있는 경우는 유일하다. 숙종은 4명의 왕비, 46년 재위, 초강력 왕권, 왕비와 집권세력 교체 등 다양한 모습을 가진 왕이다. 왕비를 폐하고 죽이고, 송시열과 같은 거물들을 일거에 처형하는 등 조변석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구리 동구릉에 들어서면 왼쪽 끝자락에 조선 제18대 현종과 명성왕후 김씨의 숭릉이 있다. 1674년 현종의 숭릉이 조성됐고 1684년 명성왕후가 옆에 묻혀 쌍릉이 됐다. 현종은 1641(인조 19)년 아버지 봉림대군(훗날 효종)과 어머니 장씨(훗날 인선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외아들이다. 아버지 효종이 청나라에 볼모로 가있을 때 심양관사에서 태어나 조선왕 유일한 외국 태생이다. 명성왕후 김씨(고종은 명성왕후 민씨)와 결혼했으며 계비나 후궁이 없는 유일한 왕이었다. 조선의 가장 정통성을 지닌 왕이 되어 15년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경기도 여주시 능서면에 자리한 영릉(寧陵)은 조선 제17대 효종과 인선왕후의 동원상하릉(봉분을 한 언덕에 앞뒤로 나란히 배치)이다. 세종(英陵)과 추존 진종(永陵)의 능호도 영릉이다.1659(효종 10)년 5월 4일 효종이 즉위 10년 만에 승하하니 건원릉 서쪽 산줄기에 묻혔다. 그러나 빗물이 스며든다하여 1673(현종 14)년 여주의 세종 영릉 동쪽에 자리를 마련해 옮기고자 능을 열어보니 침수 흔적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천장을 했다.다음해 인선왕후가 승하해 효종 왕릉 아래에 자리하니 조선왕릉 최초의 동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경기도 김포에 있는 장릉(章陵)은 왕세자가 아니었으나 추존 왕이 된 원종과 인헌왕후 구씨의 쌍릉이다. 원종은 인조의 아버지로서 선조의 5남이자 어머니 후궁 인빈 김씨의 3남으로 태어났다. 1619(광해군 11)년 정원군의 신분으로 세상을 뜨니 이듬해 양주 곡촌리(현 남양주시 금곡동)에 묻혔다. 1623년 아들 인조가 즉위하니 대원군이 됐다. 1626(인조 4)년에 부인 구씨(계운궁)가 세상을 뜨니 김포 육경원에 안장했고, 이때 대원군의 무덤을 흥경원으로 명했다. 이듬해 육경원으로 옮겨 합치고 흥경원으로 통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 구리시 동구릉의 휘릉은 조선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능이다. 첫 왕비 인열왕후가 1635년 김포 장릉에 묻히고 인조가 1645년에 승하하니 함께 합장했다. 인조는 병자호란이 끝나고 1637년 12살의 장렬왕후 조씨(양주인 한원부원군 조창원과 완산부부인 최씨의 딸)를 계비로 맞이했다. 29세나 어린 왕후였다. 그러나 장렬왕후는 자식이 없었고 후궁 조씨에 밀려 별다른 존재감이 없었다. 인조에서 숙종까지 4대에 걸쳐 왕후, 대비와 대왕대비를 지냈고 1688(숙종 14)년에 세상을 뜨니 동구릉 휘릉에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조선왕릉의 장릉은 세 곳이다. 파주에 있는 장릉(長陵, 인조와 인열왕후), 김포의 장릉(章陵, 인조의 부모: 추존 원종과 인헌왕후) 그리고 강원도 영월의 장릉(莊陵, 단종)이 있다. 인조의 장릉은 1635(인조 14)년 인열왕후가 죽으니 이듬해에 파주 운천리 장릉에 묻혔고, 1649(효종 즉위)년 인조가 승하하니 왕후 옆에 쌍릉으로 조성했다. 그러나 1731(영조 7)년 화재가 자주 일어나고 뱀과 전갈의 무리가 석물 틈에 서식하니 현재 자리로 천장하며 합장했다. 인조는 백부 광해군을 내치며 왕이 됐다. 반정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경기도 남양주에는 왕릉 4기(광릉·홍릉·유릉·사릉)가 있다. 모두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조선 왕릉이다. 그런데 또 하나의 왕의 무덤이 있으니, 바로 조선 제15대 국왕 ‘광해군 묘’다. 조선의 두 번째 폐왕 광해군의 묘는 1623년 강화도에서 죽은 부인 류씨(문성군부인)의 무덤이었다. 18년 후 광해군이 제주에서 세상을 뜨니 군부인 옆에 쌍분으로 자리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일자 세자가 되어 아버지 선조와 역할을 나눠 나라를 살폈고 왕이 되어서는 개혁정치를 펼치며 명나라와 후금사이에서 중립외교로 나라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가장 먼저 ‘목릉’에 들어선 무덤은 조선 제14대 왕 선조의 첫번째 왕후인 의인왕후의 ‘유릉’이었다. 1600년 12월 22일 의인왕후의 장사를 지냈다. 7개월 전 승하했는데 처음 포천 신평에 능자리를 정하고 절반의 공사가 진행됐는데 술관(점치는 관리) 박자우가 불길하다며 소(疏)를 올렸다. 이에 다시 건원릉 안에 정하고 유릉이라 했다. 의인왕후는 후궁의 자식들, 특히 광해군을 각별히 챙겼고 광해군이 세자 책봉과 왕위에 오르도록 지지했다. 그러나 자식 없이 45세에 세상을 떴다. 이에 선조는 32년 연하의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구리 동구릉의 목릉은 선조와 두 왕후(의인왕후 박씨와 인목왕후 김씨)가 잠들어 있다. 조선왕릉 최초로 왕과 왕후들이 같은 묘역에 자리했다. 목릉은 왕후들의 능호(능의 명칭)를 합쳐서 정해졌다. 처음 1600년 의인왕후가 유릉에 묻혔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자 숙릉으로 칭하려다 목릉으로 바꿔 건원릉 서쪽(현 헌종 경릉)에 조성했다. 1630(인조 8)년에 터가 안 좋다는 상소에 따라 현 위치로 옮기며 유릉과 목릉을 통일해 목릉으로 했다. 1632(인조 10)년에 인목왕후 김씨가 죽자 능호를 혜릉으로 정했으
글ㆍ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육군사관학교 근처에 태강릉(태릉과 강릉)이 있다. 인종의 효릉과 모후 장경왕후의 희릉이 나란히 있듯이 이곳에도 문정왕후(태릉)와 아들 명종 부부(강릉)가 가까이 있다. 명종은 어머니와 외척에 치여 제대로 빛을 보지 못했다. 인종에 이어 갑작스레 왕이 되니 12살이었다. 문정왕후의 8년 섭정과 외삼촌 윤원형, 그의 첩 정난정, 승려 보우가 정세를 이끌었다. 재위 22년, 을사사화로 많은 사람이 죽고 ‘임꺽정의 난’이 일어났다. 왜적의 침입이 끊이질 않았고 유교국가에서 대놓고 불교를 앞세우니 조정은 늘 시끄러웠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고양 서삼릉의 효릉에는 인종과 인성왕후가 묻혀있다. 이웃에 모후(장경왕후)의 희릉이 있으니 조선왕릉 최초로 어머니와 아들부부가 함께 했다. 인종은 단종과 더불어 가장 불쌍한 조선왕이다. 단종은 출생 하루 만에, 인종은 엿새 만에 모후를 잃었다. 6세에 세자가 돼 24년의 모진 세월 끝에 1544년 30살에 왕이 됐다. 인종은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유명무실해진 현량과(과거시험이 아닌 경전과 행실을 보고 논술시험으로 인재선발)를 복구하고, 조광조를 복권시키도록 했다. 그러나 1545년 즉위 7개월 11일만에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태릉은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의 능이다. 태릉은 여느 왕후의 무덤과 달리 웅장할 뿐만 아니라 왕후의 무덤임에도 중국의 황제처럼 ‘태릉(泰陵)’의 묘호를 가졌다. 문정왕후는 봉은사 주지 보우와 의논해 장경왕후의 곁에 있던 남편 중종의 무덤을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자신이 그 곁에 묻히고자 했다. 그러나 아들 명종은 왕후를 태릉에 묻었다. 문정왕후는 중종, 인종, 명종 대를 거치며 27년간의 왕비와 8년의 수렴청정, 21년의 대비의 역할을 하며 권력의 중심에 서 있었다. 왕후는 전임 단경왕후나 장경왕후와 달리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조선 최고의 세도가 딸로, 20세에 왕비에 이른 듯하더니 7일 만에 궁궐에서 쫓겨난 단경왕후. 왕과 결혼해 10여년 만에 왕자를 낳았으나 엿새 만에 25세로 세상을 뜬 장경왕후. 중종과 부부의 연을 오래 잇지 못한 왕후들이다. 조선 왕후들은 최고의 권세와 부귀를 누리는듯하다 이내 허망하게 사라진 경우가 흔했다. 집안 배경과 처세, 그리고 권력의 어느 하나가 못 미치면 왕후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 쉽지 않았다. 단경왕후는 남편 중종이 왕이 되었으나 신하들에 의해 강제로 생이별을 했다. 아무 잘못도 없이 쫓겨나
글·사진 이의준 왕릉답사가조선 왕릉에는 두 개의 정릉, 신덕왕후(貞陵)와 중종(靖陵)의 능이 있다. 중종의 정릉은 강남구 선정릉에 선릉(부모인 성종과 정현왕후)과 함께 하고 있다. 중종이 여기에 묻히기까지는 사연이 많다. 1544(중종 29)년 중종이 세상을 뜨고 이듬해 장경왕후가 묻혀있던 고양의 희릉 서쪽에 능을 조성하며 묘호를 정릉으로 바꿔 정했다. 그런데 1562(명종 17)년 세 번째 왕후 문정왕후가 중종의 무덤을 정릉에서 서초동 현 위치로 천장하고 본래 능은 다시 희릉으로 되돌렸다. 문정왕후는 사후 중종과 함께 묻히려 했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