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not caption

삼국시대에 제갈량은 유비와 처음 만나서 융중대(隆中對)라는 웅장한 전략적 대안을 제시했다. 당시의 국제정세를 냉정하게 분석한 제갈량은 ‘천하삼분’이라는 할거전략을 설명했다. 요점은 약자인 오와 촉이 연합해 강자인 조조에게 대항한다는 것이었다. 이 전략에 따라 유비는 손권과 연합해 적벽대전에서 조조를 크게 무너뜨린 후에 형주(荊州)를 차지했고, 나중에 다시 익주(益州)를 차지해 촉한을 건국하고 세력균형의 한 축을 형성할 수가 있었다. 오와 촉이 연합을 하면 조조보다 강하지만 분리되면 국력이 조조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러한 상황은 일시적인 대치상태를 이루었다. 그러나 상황이 변화했다.

AD219년 촉의 대장 관우(關羽)는 한중(漢中)을 탈취해 이름을 드날렸고, 손권과 연합해 조조를 치기로 했다. 관우는 강릉(江陵)에서 북쪽으로 진군하고, 손권은 합비(合肥)를 공격했다. 관우는 번성(樊城)에서 조인(曹仁)의 부하 우금(于禁) 등 7군을 수장시켰다. 번성이 포위되자 화하(華夏)가 진동했다. 도저히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한 조조는 관우의 강력한 공격을 피해 본거지까지 옮기려고 했다. 이 시기에 제갈량의 호적수 사마의(司馬懿)가 등장한다. 그는 조조를 능가하는 현실적 안목과 권모술수의 대가였다. “우금의 부대가 수몰됐지만 국가의 대계를 그르칠 만큼의 큰 손실을 입은 것은 아닙니다. 유비와 손권은 겉으로는 친하지만 속은 딴판입니다. 관우가 뜻을 이루는 것을 손권은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지금 사람을 손권에게 보내어 강남을 떼어주겠다고 하면 저절로 번성의 포위가 풀릴 것입니다.”

사마의는 적을 분산시켜서 세력을 약화시킨 후에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조는 그 의견을 받아들였다. 조조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했지만, 손권은 일부러 이익을 주겠다는 유혹에 넘어가는 척 했다. 게다가 전에 관우에게 사돈을 맺자고 요청했다가 한마디로 거절당한 적도 있었다. 적벽대전 이후 형주를 유비에게 내주고, 마지못해 빌려주었다는 명분만으로 노심초사하던 손권은 관우를 공격해 형주를 탈취할 기회라고 생각했다. 조조의 사신이 오자 손권은 관우를 토벌하게 되면 자기의 공로라는 것을 주장하고, 이러한 사실을 폭로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손권을 우방으로 생각하고 있던 관우는 그에 대한 특별한 대비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조조의 모사 동소(董昭)는 이러한 사실을 폭로하는 것이 좋다고 건의했다. 그는 두 적을 동시에 상대할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 관우가 이 소식을 알면 되면 앉아서 그 위태함을 맞이할 리가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은 관우는 강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번성에서 대공을 세우고자 하고 있으며 절대 물러날 사람이 아니라는 점과 조조군이 퇴각하는 것을 알면 오히려 사기가 높아져 더욱 공세를 취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과연 동소의 견해와 달리 관우는 번성에서 철수하지 않았고 형주는 오군의 습격을 받아 함락됐다. 관우는 앞뒤로 적을 맞이해 맥성(麥城)으로 패주했다가 손권에게 잡혀서 죽었다.

조조는 유비와 손권의 모순관계를 이용해, 이익으로 손권을 유혹해 쌍방의 연맹을 깨뜨렸다. 촉한은 큰 손실을 입었고 점차 국력을 잃어갔다. 그러나 손권도 별다른 이득을 얻지 못했다. 비록 형주를 얻었고, 촉과의 이릉대전(夷陵大戰)에서 무려 7백리에 이어진 영채를 불태우는 완승을 거두었지만 다시는 북상해 천하를 노릴 기회를 가질 수가 없게 됐다. 조조는 유비와 손권의 연맹을 깨뜨려 점차적으로 우세를 차지하기 시작했고, 이후로 촉과 오가 다시 연맹을 했지만 이미 그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 하나의 모략이 삼국의 대치상황을 무너뜨리고 위를 가장 강대한 나라로 만들었다. 강자를 이기기 위해서는 약자끼리의 동맹이 절대 필요했다. 노숙과 제갈량은 그것을 알았지만, 손권과 유비는 몰랐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