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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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수신(石守信 928~984)은 북송의 개국공신으로 태조 조광윤과는 결의형제였다. 그의 아들 석보길(石保吉)은 태조의 둘째딸 연경(延慶)공주와 결혼했다. 일찍이 후주의 세종 시영(柴榮)을 따라 남당을 정벌할 때 선봉으로 전공을 세운 이후 황제의 친위대인 금군의 주력부대를 지휘했다. 시영이 서거하고 아들 시종훈(施宗訓)이 계위하자 의성군절도사겸전전도지휘사로 임명됐다. 석수신은 조광윤이 우두머리인 ‘의사(義社)십형제’ 가운데 이계훈(李繼勛), 조광윤에 이어 3번째 자리를 차지했다.

그는 오랫동안 조광윤의 부하이자 가장 가까운 심복이었다. 현덕7년(960) 정월 초, 조광윤은 차상 왕부(王溥)와 모의해 북한과 요가 남침한다는 보고서를 조작했다. 왕부는 수상 범질(范質)에게 조광윤을 북상시키라고 재촉했다. 석수신은 전전사를 맡아 수도에 남았다가 내응하기로 했다. 조광윤은 저녁에 병변을 준비하면서 심복 곽연윤(郭延贇)을 수도로 보내 석수신에게 계획을 알렸다. 석수신은 장병들에게 새벽까지 대기하라고 명했다. 조광윤의 군대는 손쉽게 수도로 입성했다.

송이 건국된 후, 석수신은 6명의 익대공신(翊戴功臣) 가운데 첫째 자리를 차지했다. 건륭원년(960) 4월, 소의군절도사 이균(李筠)의 반란을 평정하고 동평장사가 됐다. 동년 9월, 후주의 시위마보군도지휘사였던 회남절도사 이중진(李重進)이 반란을 일으키자, 석수신을 남방원정군의 총사령관으로 파견했다. 조광윤도 따라와 독전했다. 11월, 석수신이 양주를 점령하자, 이중진은 분신자살했다. 건륭2년(961) 7월, 조광윤은 숙장들의 병권을 해제하고, 석수신을 지금의 산동성 동평인 천평군(天平軍) 절도사로 임명했다.

시위마보군도자휘사라는 군직은 유지했지만, 병권에 대한 실권은 없었다. 962년 9월, 동평장사가 돼 재상의 역할을 맡게 된 석수신은 조광윤의 본심을 알아차리고 스스로 병권과 시위마보군도지휘사를 내려놓고 천평군절도사에 전념하겠다는 표를 올렸다. 개보6년(973), 시중으로 승진했다. 태종이 즉위하자 중서령으로 승진했다. 석수신은 스스로 천평군절도사로 나가 17년 동안 다른 직책을 맡지 않고 엄청난 재산을 모아 거부로 지냈다.

석수신은 불교를 신봉했다. 서경에 숭덕사를 세우느라고 수많은 사람들을 동원했지만 공임을 주지 않아 원성이 높았다. 979년, 태종은 북한을 정벌하고 내친김에 요의 남경인 유도부(幽都府)를 공격할 때 숙장인 석수신을 독전군으로 등용했다. 고량하(高梁河)의 전투에서 태종이 직접 독전했으나 대패하고 철수했다.

동년 8월, 태종은 패전책임을 제장들에게 미루면서, 특히 수중서령이자 서경유수인 석수신이 독전군으로서 군율을 잃었다고 문책했다. 얼마 후에 다시 위(衛)국공으로 봉해졌으나 태평흥국7년(982) 6월, 향년 57세로 사망했다. 장지는 하남 낙양의 선무촌(宣武村)은 측천무후의 화원이었는데 석수신의 자손들도 모두 이곳에 묻혀 대규모 가족묘지로 변했다. 그러나 한 시대를 누빈 석수신의 묘는 현재 자취도 남아 있지 않다. 석수신은 엄청난 부를 모으자, 향락에 빠져 지냈다. 그러나 한가한 날도 오래 계속되지 못했다.

하루는 그의 친구 양언온(梁彦溫)의 아들 양주한(梁周翰)이 찾아왔다. 재기가 넘치는 젊은이를 본 석수신은 사랑스러운 마음이 생겨 그의 이름을 기록해두었다. 얼마 후, 술자리에서 조광윤이 양주한을 비서로 삼겠다고 말했다. 석수신이 그 사실을 양주한에게 일러주었다. 양주신은 흥분한 나머지 다급하게 황제에게 감사편지를 보냈다. 화가 난 조광윤은 양주한을 수도에서 내쫓았다. 석수신은 식은땀을 흘렸다. 친구에 대한 인정과 의형인 황제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순수한 마음이었지만, 결과가 이렇게 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의형인 황제는 냉대하지 않았으나, 석수신은 이후로 정치나 인사에 관한 일에 일제 간여하지 않았다. 분수를 잘 지켰으나 환갑도 되지 않아 죽었으니 힘들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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