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춘추전국시대의 교체기에는 사람들이 변했다. 중앙에 집중됐던 정치, 경제, 사회 문화가 로컬로 다변화되자 개인은 물론 사회적 관심도 우후죽순처럼 여기저기에서 갖가지 모습으로 등장했다. 시경의 변풍(變風)과 변아(變雅)는 이러한 현상에 대한 문학적 귀결이었다. 노자, 공자, 묵자는 사회의 부패와 어두움을 폭로하고 비판하면서 인간의 사회적 속성과 자연적 속성의 관계에 대한 열띤 토론이 전개했다.

인(仁)이 논쟁의 중심 관념으로 자리를 확보했다. 역사학자 후외려(侯外廬)는 주왕조의 세왕표(世王表)를 분석한 결과 동주시대에 인을 거론한 군주가 없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이라는 글자는 늦으면 동주시대 후기, 빠르면 제환공이 패업을 달성한 이후에 등장했을 것이다. 인이라는 글자는 사람(人)과 둘(二)로 구성돼 두 사람이 서로 친하고 사랑하는 것을 나타낸다. 사람이 서로 친하고 사랑하는 관계라는 개념적 설정은 인간의 자연적 본성이 선하거나 악한 것에 영향을 받는다는 의미였으므로, 훗날 복잡다기한 사회 환경에 대한 걱정거리를 종합한 논쟁의 발단이 되기도 했다.

의리(義利)에 관한 문제는 인성에 관한 문제로 발전했다. 시대적 논쟁이 시작된 것은 당시의 사회적 환경이 결정적 요인이었다. 첫째는 정치가 제대로 일어나면 민심이 순응하고, 정치가 폐단을 일으키면 민심도 거스른다는 민본주의가 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승인되고 접수됐다. 백성의 물욕과 이익에 대한 문제는 사상가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주제였으며, 통치자에게도 치국의 방략을 결정하는 출발점이었다. 둘째, 신흥계급인 소농, 공인, 상인에 정치, 경제, 사상적으로 자기의 이익을 보호하라고 요구하기 시작해 공리주의적 경향에 불을 붙였다.

셋째, 사회적 빈부의 불균형은 의리와 이익에 대한 선후와 경중에 대한 문제를 야기해 물욕이 곧 인성의 근본이라는 사회적 합의에 도달하자 부의 추구가 인이 아니라는 전통적 관념에 도전했다. 당시의 현학이었던 유가와 묵가의 대립은 결국 의와 이의 관계를 따지는 것에 집중됐다. 공자는 논어 이인(里仁)에서 군자는 의(義)를 말하지만, 소인은 이(利)를 말한다는 인식으로 이를 폄하했다. 그의 이는 개인적 차원이었다. 사회적 의무를 중시한 공자는 때문에 개인적 이를 배척했다. 공자가 이에 대한 언급을 꺼린 것은 의를 개인적 이해관계가 배제된 의무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사회적 의무를 최고의 도덕적 원칙이라고 생각했다. ‘어질지 않은 사람은 어려움을 견디지 못하고 안락도 즐기지 못한다. 인자는 인을 편안하게 여기고 지자는 인을 이익으로 여긴다’거나, ‘군자는 천하의 일에 대해 너무 가까이 하거나 너무 멀리하지 않으며 의를 헤아림의 기본으로 삼는다’는 말은 인의 사회적 가치에 대한 설명이다.

공자의 이러한 관점에 반대한 묵자는 의리에 대한 인식을 체계적으로 설명했다. 우선 묵자는 개인적 이익추구에 합리성이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개인적 이익추구는 천하의 이익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실현될 뿐이라는 전제조건을 달았다. 묵자가 천하의 이익을 크게 일으키고, 천하의 해악을 제거한다고 주장한 것은 백성의 부와 나라의 안녕을 위한다는 목적으로 귀결된다. 백성의 부와 나라의 안녕은 개인의 이익과 욕망을 실현함으로써 가능하다. 묵자는 상호이익(互利)을 강조했다. 호리는 묵자가 주장하는 정의의 구체적 내용이다. 그가 의를 천하에서 가장 소중한 보물이라고 한 것은 그것이 천하의 이익이라는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묵자의 정의는 공리(功利)를 목적을 삼는다. 이러한 공리의 목적은 개인적 소리(小利)에 국한되지 않는다. 공리의 궁극적 목적은 ‘겸상애, 교상리’라는 대리(大利)에 있었고, 대리를 추구하는 것이 대의였다. 묵자는 천하의 이익을 일으키고, 천하의 해악을 제거하는 것이 최고의 선이었다. 개인의 이익과 사회의 이익이 역전되지는 말아야 한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