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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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칠현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산도(山濤)는 자가 거원(巨源)이었다.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결국 사마씨 정권에 들어가 주로 인재를 추천하는 일을 맡았다. 혜강(嵇康)에게 넌지시 관직을 맡으라고 권했다가 유명한 ‘산거원에게 보내는 절교장’을 받았다. 일찍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혜강에 비해 80세 가까이 살았다. 그에 대한 평가는 극과 극이다. 그러나 자신이 맡은 일은 충실하게 완수했다. 인사책임자는 그가 가장 훌륭하게 완수한 직책이었다. 관리의 결원이 있을 때마다 미리 준비했던 몇 사람의 명단을 올렸다가 황제의 조서를 보고 다시 확정자를 정해 상주했다. 먼저 황제 사마염(司馬炎)이 마음에 둔 사람을 파악하고, 반드시 그를 예비자 명단에 넣었다. 사람들은 자세한 사정을 알지 못하고, 산도가 자기 마음대로 사람을 등용한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은 사마염의 면전에서 산도가 인사권을 남용한다고 비난했다. 사마염은 직접 조서를 적어 산도에게 경고했다.

“사람을 쓰는 표준은 재능이다. 멀고 가까움이나 비천을 가리지 않고 유능한 사람이면 재능을 천하에 널리 펼쳐 교화하도록 하라.”

겉으로는 산도를 문책한 것 같지만, 사실은 산도를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였다. 눈치가 빠른 사람들은 산도를 비난하지 못했다.

산도가 상주해 추천한 사람의 명단이 책으로 완성되자, 당시에 그것을 산공계사라고 불렀다. 그가 전후로 추천한 백관들은 모두 현능했다. 사마염이 조령으로 육량(陸亮)을 임용할 때만 의견이 달랐다. 산도가 항변했지만 사마염은 듣지 않았다. 얼마 후 육량은 뇌물수뢰죄로 파면됐다. 사마염은 정색하고 산도에게 사과했다. 산도는 조정의 각 파벌 가운데 중도를 지켰다. 만년에 양황후의 친당이 정치를 전횡할 때도 양씨를 등용하지 않았다. 나중에 중병에 걸린 산도가 물러나겠다는 글을 올렸다.

“신의 나이는 80에 가깝습니다. 조석으로 기침이 심하니 국가에 조금도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성세에 여력을 다하고 싶지만, 늙고 쇠약해 더 이상 중임을 맡지 못합니다. 지금은 사해가 무사하고, 천하는 교화에 잘 따르고 있습니다. 민심에 따라 무위의 정치를 펼치시면, 백성들도 바르게 살 것입니다. 풍교(風敎)를 숭상해 민속이 두터워지고 있으니, 폐하께서 무슨 일을 해도 좋습니다. 신은 귀가 멀고 눈도 어두워 더 일을 할 힘이 없습니다. 군신부지지간에는 조금도 숨길 것이 없으니, 어리석은 생각을 그대로 말씀드렸습니다.”

그는 모자를 벗고 맨발로 걸어서 인수를 반납했다. 사마염이 조칙을 내려 산도를 위로했다. 산도가 글을 올려 간절히 퇴직을 요청했지만, 사마염은 끝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상서 위관(衛瓘)이 나서서 상주했다.

“산도는 하찮은 병으로 오랫동안 직무를 맡지 않고 있습니다. 여러 차례 조칙을 내렸지만, 명령에 따르지 않습니다. 조정에서는 그가 고상한 기절을 이루려고 직무를 맡아야 하는 공적인 요구를 위배한다는 논의가 있습니다. 만약 산도의 병이 중하다면 관직에 있지 말아야 하니, 산도의 관직을 면해주시기 바랍니다.”

어쩔 수 없었던 사마염이 위관에게 조칙을 내렸다.

“산도는 덕조가 있어서 평소에 많은 사람들이 우러러보고 있다. 진심으로 물러나겠다는 마음이 매우 간절하다. 계속 조칙을 내려 그의 주장을 반드시 바꿔 조정을 바로잡고 부족함을 보충하려고 한다. 조서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오히려 곡해하고 있다. 이는 현자를 존중하는 기풍을 해치고, 나에게 현자를 무시하고 무덕하다는 오명을 씌우는 짓이다.”

사마염과 산도 사이에 오고간 각본도 없는 연극이 돋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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