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천추말기에서 전국시기까지 거대한 사회적 혼란과 변혁에 맞춰 의식형태에서 중국사상 첫 번째 사상적 대해방과 학술적 대번영의 황금시대가 나타났다. 각종 학설과 유파가 우후죽순처럼 솟아나면서 백가쟁명(百家爭鳴)이라는 미중유의 장관이 펼쳐졌다.

전국시기 제(齊)의 수도 임치(臨淄)에 개설된 직하학궁은 다양한 학자들의 토론장으로 학술교류와 문화전파의 중심이 됐다. 유가, 도가, 묵가, 법가, 음양가, 종횡가, 황로학 등의 학파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직하에서 각자의 이론을 펼쳤다. 전국시대는 정치적 혼란과 겸병전쟁이라는 부정적 측면도 있지만, 사족계층의 다양한 사상이 펼쳐지면서 귀족중심의 정치형태가 무너졌다는 긍정적 측면도 있다. 직하학궁은 중국사상 거대한 역사발전을 추동했다.

직하학궁 제환공 전오(田午)가 창건해 여섯 군주를 거치면서 150년 정도 지속됐다. 전성기에는 1천여명의 선생과 학생들이 모여 연구원, 대학당, 정책자문 등의 역할을 수행했다. 유명한 직하학궁의 선생은 순우곤(淳于髡), 맹가(孟軻), 전병(田騈), 신도(愼到), 환연(環淵), 순경(荀卿), 노중련(魯仲連), 추연(鄒衍) 등 19명이다. 이사(李斯), 한비(韓非), 굴원(屈原) 등도 직하에서 유세하거나 공부했다. 각 학파가 탐구하고 토론한 주제는 특별한 제한이 없었다. 이들은 다른 학파의 관점을 비판하면서 각자의 주장을 자유롭게 펼쳤다. 광활한 우주의 신비함을 찾거나, 평범한 일상사에 이르기까지 깊이 파고들었다. 직하학자들은 왕도(王道)와 패도(覇道)에 대한 변론, 대일통의 필요성, 의리(義利)에 대한 논쟁, 하늘과 인간의 관계, 인성의 본질, 세계의 근원, 명(名)과 실(實)의 논리적 개념, 음양오행설 등을 통해 치국안방(治國安邦)을 위한 정치이론 확립에 강한 의지와 열정을 표출했다. 각 학파의 주장은 다양한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됐다. 

전(田)씨가 강(姜)씨 제(齊)를 탈취한 사건은 진(晋)이 한(韓), 위(魏), 조(趙)로 3분된 사건과 함께 전국시대로 넘어가는 이정표였다. 전오는 전씨대제(田氏代齊)의 후유증을 극복하기 위해 여론의 지지가 필요했다. 정치권력을 안정시키고, 다시 국위를 떨치려면, 능력위주로 인재를 발탁한 제의 전통을 계승할 필요가 있었다. 그의 모델은 정적인 관중(管仲) 등용하여 부국강병을 이룩한 제환공 강소백(姜小白)이었다. 전오는 국가적 인재양성풍조를 이룩하기 위해 직하학궁을 창건하고, 천하의 인재들을 초빙했다. 운영원칙은 학자들에게 학문적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었다.

아들 위왕(威王) 전인제(田因齊)와 선왕(宣王) 전벽강(田辟彊)이 직하학궁을 발전시켰다. 위왕은 추기(鄒忌)의 보좌를 받아 강력한 국가를 만들었다. 전국시기에 가장 먼저 개혁을 통해 부국강병을 달성한 위(魏)와 국력을 견주며 서로 왕으로 인정했다. 선왕의 시기에 제의 종합국력은 열강 가운데 최고였다. 직하학궁도 전성기를 맞이했다. 맹자가 직하학궁의 총장인 좨주(祭酒)로 활약한 것은 이 시기였다. 76명의 직하선생은 상대부에 해당하는 대우를 받았다. 이들은 국군을 포함한 어느 누구도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을 정도로 언론의 자유를 누렸다. 

그러나 BC265년, 어린 전건(田建)이 즉위해 모후가 집권하면서 융성했던 제는 암흑기로 접어들었다. 대부분의 직하학자들은 진(秦)에게 매수됐다. 그들은 더 이상 제에 충성하지 않았다. 좨주 순경은 제의 재상에게 모후가 궁을 어지럽히고, 사악한 신하들이 조정을 장악했다고 비판했다가 오히려 역공을 받자 초로 망명했다. 제의 통치자는 강진의 겸병전쟁에 개입하지 않았다. 다른 5개의 나라가 진에게 차례대로 망하는 동안 팔짱을 끼고 관망했다. 제는 결국 BC221년에 진에게 망했다. 결정적인 요인은 유세객의 말들 듣고 반간계에 넘어간 것이었다. 직하학궁도 제를 따라 역사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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