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관우 역사작가/칼럼니스트

도산(島山)은 1935년 여름부터 평양에 올라가 대보산(大寶山) 자락에 비용이 적게 들면서 편리한 가옥을 7~8칸 크기로 직접 설계하고 공사에 정성을 쏟았다.

본래 이 집터는 송태사(松泰寺)의 유허지(遺虛址)로 40~50년 전에는 전각과 고탑이 있었던 곳이었으며, 대보산은 고구려 불교의 중요한 도량이 있었던 곳으로서 송태선인(松苔仙人)의 은거지(隱居地)로 알려진 곳이었다.

이와 관련해 송태선인은 고구려 시대에 유명한 선인이었으며, 그 선인이 수도했던 곳이 바로 송태사가 있는 대보산이었던 것이다.

송태산장에 거주하고 있던 도산은 1936년 말에 국내를 떠나 국외로 다시 나가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중국으로 건너가면 일제의 검거망에 포착될 위험이 있었으며, 소만(蘇滿) 국경지대도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감돌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떤 경로를 결정하든지 문제는 망명길을 극복할 수 있는 건강이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1937년 5월 이광수(李光洙)가 송태산장을 방문하여 도산에게 일제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그래서 수양동우회(修養同友會)를 해산하여 예봉을 피하던가 아니면 앞으로 회합을 가질 경우에는 일본어를 사용해야 한다는 것을 건의하였다.

이와 관련해 이광수가 갑자기 도산을 방문하게 된 연유는 당시 회장(會長)을 맡고 있던 주요한(朱耀翰)에게 4월 종로서 고등계 조선인 형사가 수양동우회를 해산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어 그냥 지나쳤는데 일본어를 써야 한다는 말을 듣고 이광수가 송태산장을 방문하였던 것이다.

도산은 이광수에게 5월 20일에 상경할 것이니 이사회를 소집하라고 지시하였지만 정상적으로 열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집회 허가와 관련해 종로서에서 첫째. 소집 통지서를 일본어로 쓸 것, 둘째. 집회의 용어를 일본어로 할 것을 조건으로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때 도산은 위장병이 심해져 병석에 눕게 되어 5월 20일의 상경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한편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는 수양동우회 간부들을 일제히 검거할 준비를 하여 6월 6일 새벽에 종로서 고등계는 간부 10여명을 검거하고 가택 수색에서 압수된 회원 명부에 근거하여 전국에서 150명의 회원들을 검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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