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이사장 

 

북한 지도자의 신격화 역사는 해방 직후 스탈린주의로 이식돼 3대까지 이어졌다. 항일빨치산 출신 김일성은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고 가랑잎 한 장을 타고 대하(大河)를 건넜다고 침소봉대했다. 김정일은 72홀 평양골프장에서 38언더파 34타를 쳤고, 홀인원을 11번 했다고 한다. 어디 그 뿐인가. 북한 교과서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세 살 때 자동차를 운전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다른 자료엔 세 살 때 사격을 했는데 100m 앞의 전등과 병을 줄줄이 맞혔다는 내용도 담겼다. 그러나 이젠 신격화나 우상화도 정도껏 해야 하는 걸 북한 지도부도 깨달아 가는 모양이다. 북한 노동신문이 어제 ‘축지법의 비결’이라는 제목의 기사로 축지법이 불가능하다고 실토했다. 김일성이 항일운동 시절 매복했던 것을 두고 “일제 놈들이 ‘유격대가 축지법을 쓴다’고 했다”고 전하며 신화적인 대목을 걷어냈다.

북한 주민들 사이에선 축지법 노래를 비틀어 ‘장군님 쌀구걸 하신다’ 등 패러디가 돌아다녔다고 하는데 이젠 우상화가 점점 통하지 않고 웃음거리가 되고 있음을 북한 노동당도 알아차린 것일까. 북한에도 휴대전화가 600만 대나 보급됐으니 황당무계 우상화가 통하지 않을 때도 됐다. 김정은은 지난해 한 서한에서 “수령의 혁명 활동과 풍모를 신비화하면 진실을 가리게 된다”며 탈신격화에 시동을 걸었고 이번 보도를 계기로 한발 더 앞서가기 시작했다. 할아버지의 외모를 흉내 내 후광으로 활용했던 김정은으로서는 선대와 결별하는 모험일 수도 있다. 모래로 쌀을 만들었다는 김씨 왕조의 신통력은 현실이 될 수 없지만, 핵을 포기하고 개방하면 주민을 굶주림에서 벗어나게 하는 기적을 이룰 수 있다. 시대착오적 우상화에서 현실세계로의 이행이 더 적극적이고 가속화돼야 한다.

그렇다고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개인숭배, 즉 ‘신비화’는 그 방법만 바뀌었을 뿐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자신을 깊숙이 감추고 ‘잠행통치’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지난 4월 11일 노동당 정치국 회의 뒤 모습을 감추었던 김 위원장은 꼭 20일 뒤인 5월 1일 잠깐 모습을 보여주고는 다시 사라져 버렸다. 온 세계가 그의 행적을 주목하던 나머지 사망설, 중태설로 세상을 시끄럽게 만드는 것이 그의 신비화 뉴패러다임으로 보인다. 최근에도 21일째 공개석상에 나타나지 않고 있는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거처를 원산에서 평양 외곽 강동군으로 옮긴 정황을 미 당국이 파악한 것으로 21일(현지 시간) 확인됐다. 미 행정부 관계자는 동아일보에 “김정은의 차량, (원산에서 포착됐던) 기차 및 그의 말 등이 모두 강동군 특각에서 이번 주 포착됐다”며 “우리는 그가 강동군에 머무는 것으로 보고(suspect) 있다”고 말했다. 김 위원장의 승마 사랑은 유난해 거처를 옮길 때도 말 운반용 트레일러가 동원되는 것으로 전해졌다.

미 당국은 김 위원장의 신변이상설이 나왔던 지난달 15∼20일 김 위원장이 원산에서 걸어 다니는 모습을 포착하는 등 ‘거미줄 감시망’을 가동해 왔다. 미 대북정보력의 핵심은 ‘키홀(Key Hole)’로 불리는 첩보위성으로 자동차 번호판까지 식별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함께 미국은 각종 정찰자산을 투입해 북한을 감시하고 있다. 김 위원장이 미국의 감시망을 벗어난다고 노력해 봤자 어항 속의 물고기와 다름없다는 것은 명백한 현실이다. 김 위원장이 평양으로 복귀하지 않고 강동군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평양의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상황 때문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김 위원장의 전용 기차는 ‘움직이는 집무실’ 기능을 갖춘 만큼 당분간 특각과 기차 등에서 통치를 이어갈 것이란 분석이다. 김 위원장이 보안을 의식해 한미 당국에 노출된 원산에 장기간 체류하는 것을 피하려고 했을 가능성도 있다. 여기에 북한의 2인자 최용해의 움직임이 40여 일 동안 포착되지 않아 내부적으로 또 다른 권력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하여간 코로가19가 물러가지 않는 한 김정은의 ‘잠행통치’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며, 이 잠행이 또 다른 지도자의 신비화, 우상화로 이어질 가능성은 대단히 높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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