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지역 고구려 답사] 마한의 고성에 적색기와의 비밀 (1)
[남한지역 고구려 답사] 마한의 고성에 적색기와의 비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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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사산성은 왕성… 목지국과의 연관도

안성에서 바라본 사산성
안성에서 바라본 사산성

충청남도 ‘직산(稷山)’은 북쪽에서 내려가는 천안(天安)의 길목이다. <여지승람>의 제16권 직산현 조 지리에 관한 기록을 보자. 천안과는 가장 가깝다.

“동쪽으로 진천현 경계까지 33리이고, 경기도 안성군 경계까지 21리이다. 북쪽으로 같은 군 경계까지 25리이고 남쪽으로 천안군 경계까지 10리이다. 경도와의 거리는 1백 89리이다.”

조선 전기 명필이며 대제학까지 지낸 옹재 안숭선(雍齋 安崇善)은 시를 잘 지었다. 그가 직산을 돌아보며 옛 터의 그윽함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소나무 소리 깊은 동산이 고요하고

까마귀 짖어대니

옛 터 그윽하다

(鴉躁古墟幽 安崇善 詩 ‘松聲深院靜’ 云云)

옛 이름은 ‘사산(蛇山)’이라고 했다. 사산이라는 이름은 어느 시대 누구에 의해 지어진 것일까. 바로 이 지역을 점령한 고구려 사람들이다(<여지승람> 고구려 취지 위 사산 운운: 高句麗 取之 爲 蛇山 云云). 고구려인들은 왜 이 지역을 사산이라고 한 것일까. 직산읍 군동리 산 10-4번지에 구축된 내외성의 고성을 ‘사산성’ 이라고 부른다.

<삼국사기>에 기록되는 사산(虵城)은 백제 본기 책계왕조(286년)에 처음 보인다. 왕성인 위례성을 수리, 고구려 침공을 대비한 왕은 아차성과 사성을 수축하고 이에 대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다음 기록은 개로왕대(475년)다. 위례성에 대한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였던 개로왕은 강변을 따라 제방(나성으로 보아야 할 듯)을 축조했는데 사산의 동쪽으로부터 숭산의 북쪽에 이르렀다고 되어 있다. 사성을 언어학자들은 ‘바람드리’로 해석한다. 사(蛇)는 ‘배암’으로서 ‘바람’과 음이 유사하고, 평야의 뜻인 ‘들’로서 고대에는 취락의 성읍(城邑)을 뜻하는 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백제 왕성으로 추정되는 풍납토성(風納土城)을 책계왕, 개로왕 조에 등장하는 ‘사성’으로 비정한다. <주역>에서의 해석은 ‘巳’를 ‘양기(陽氣)가 다 베풀어 마쳤음을 뜻한다’고 풀이한다. 열기가 땅으로 스며드는 시기로 만물이 무성해진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뱀은 또 작은 ‘용(龍)’으로 비유한다. 갑골문의 ‘蛇’는 긴 몸과 뾰족한 머리를 가지고 꿈틀거리는 듯하다. 과거 중국인들은 용은 뱀이 변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뱀을 ‘작은 용’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전설에 따르면 고대 중국의 남방에 파사(巴蛇)라는 큰 뱀이 있었다. 파사는 큰 코끼리를 통째로 삼키고 삼년이 지나서야 그 코끼리의 뼈를 토해냈다. 이 뱀은 항상 사람을 잡아먹었는데, 아홉 개의 해를 활로 쏘았던 영웅인 후예가 나중에 이 뱀을 죽였다. 뱀이 죽은 후에 그 뼈가 변해서 산이 되었다고 한다.

중국 신화에 등장하는 조상 복희, 여와의 하반신은 뱀의 모습이다. 이들은 대홍수로 인류가 멸망했을 때 표주박 배를 탄 까닭으로 살아남아 인류의 선조가 되었다고 한다. 또한 복희는 뇌신(雷神)의 아들로 팔괘를 정하거나, 인류에게 불씨를 주어서 동물의 고기를 구워먹을 수 있게 만들었다고도 한다. 우리의 고대 설화 속에는 왕과 뱀의 연관을 다룬 것이 종종 있다. 신라 경문왕은 항상 뱀과 같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고구려인들의 벽화에는 꿈틀거리는 뱀이 많이 등장한다. 이를 감안하면 사성은 왕성의 의미로 해석됨이 옳다.

천안 직산의 사산성을 <백제 본기> 책계왕조의 ‘사성’으로 비정할 수는 없다. 백제 초기 초도 위례성을 직산으로 비정하는 일부학자들은 사산성을 백제 초기 ‘사성’으로 지목하기도 하지만 이는 무리라고 생각한다.

왜 고대인들 특히 고구려 사람들은 직산을 ‘사산성’이라고 부른 것일까. 이 성을 왕성(王城)이 상으로 지칭한 것은 아닐까. 이를 뒷받침할 비밀 역사가 있다. 사산에는 마한시대부터 백제 초기, 고구려 진출에 대한 비밀을 내포하고 있다. 오늘은 비밀의 성 직산 사산성을 답사해 보자.

사산성 내성
사산성 내성

마한 수장국 목지국 설

마한 54개국의 수장국은 바로 ‘목지국(目支國)’이었다. 고대 역사연구에서 목지국처럼 핫한 소재도 없을 게다. <삼국지> 위지동이전(魏志東夷傳)에는 ‘월지국(月支國)’으로 기록되어 있다. 백제가 마한의 주도 세력으로 흡수 성장하기 전까지 마한 소국연맹체(小國聯盟體)의 중심 세력이었다.

목지국의 위치에 대해서는 직산설이 가장 우세한 가운데 한반도 중남부 지역에서 청동기 유물이 비교적 풍부하게 발견되는 예산, 전라북도 익산(益山), 금강 유역, 나주 영산강 유역 등지로 비정되기도 한다. 백제 복국운동의 거점이었던 주류성처럼 백가쟁명하다.

고 이병도 박사는 <여지승람> 직산현조(稷山縣條)의 기록을 토대로 ‘진국(辰國) 이래 목지국이 직산에 위치했다’고 주장했다. 언론사학자였던 고 천관우는 인천의 고호가 미추홀(彌趨忽)의 음인 목지와 같다고 하여 인천에 비정한 바 있다. 고려대 김정배 교수는 예산지역에서 청동기의 출토 예가 많은 것에 주목하여 종래의 익산설을 바꾸어 예산지역을 목지국의 중심지라고 주장했다. 한편 전남지역 고인돌 연구에 힘을 써온 이영문 교수는 전남지방 고인돌의 밀집 분포권을 설정하고 마한사회가 고인돌과 일정한 상관관계가 있음을 주장한 바 있다.

필자는 ‘직산 목지국설’을 지지해 왔다. 직산 접경은 바로 경기도 안성 땅이다. 안성천 하나로 마주하고 있다. 안성의 ‘安’은 ‘眼’으로 쓸 수 있으며 이는 눈 ‘目’자로도 이해할 수 있다. 안성은 비옥한 평야지역으로 고대 국가가 성립 할 수 있는 요건을 지니고 있다.

(직산은 신라 정복 이후 안성군인 백성군(白城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으며 고려시대에 비로소 군명을 직산으로 고쳤다. 1018(현종 9)년에 천안부에 소속되어 감무를 두었으며 조선시대에는 1393(태조 2)년에 직산을 지군사(知郡事)로 승격시켰다가, 1401년(태종 원년)에 강등하여 다시 감무를 설치하였다.)

안성평야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해발 178m의 야산은 직산 사산성이다. 이 정도의 높이라면 토성을 구축할만한 여건이다. 마한국은 큰 공역이 수반되는 석성이 없었다. 다만 동네 청장년들이 힘을 모아 언덕형태의 토루를 구축하고 살았다는 중국 기록에서 보듯이 초기형태의 토성이었던 것이다.

(후한서에 ‘읍락에 섞어 사는데 성곽은 없다(散在山海間 無城郭)’는 기록과 삼국지에는 ‘나라에 일이 있거나 관가에서 성곽을 쌓게 하면 여러 건장한 젊은이가 모두 등가죽을 뚫어 큰 줄을 꿰고 또 1장(丈) 정도 되는 나무를 매달고 하루 종일 소리를 지르며 힘을 다하여 이를 고통으로 여기지 않는데 작업을 독려하며 또한 이를 강건함으로 여긴다(其人性彊勇,魁頭露 紒 如炅兵,衣布袍,足履革。其國中有所爲及官 家使築城郭,諸年少勇健者 皆鑿脊皮,以大繩 貫之,又以丈許木之,通日呼作力,不以爲痛)는 기록이 있다.)

평화롭던 마한이 북방 계통의 온조가 평화를 가장하여 군비를 다듬고 위협이 되자 목지국은 장정들을 징집하여 사산에 토성을 쌓은 것인가.

우선 백제 초기 마한과의 충돌 기록을 보자.

백제 온조왕 24년(AD6) 가을 7월, 임금이 웅천에 목책을 세우니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어 책망하여 말하였다. “왕이 처음에 강을 건너 왔을 때에 발을 디딜 곳이 없어서, 내가 동북 의 1백리 땅을 내주어 편하게 살게 하였다. 이는 왕을 후하게 대접한 것이니, 왕은 마땅히 보답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라가 완비되고 백성들이 모여드니 스스로 대적 할 자가 없다고 생각하여 성을 크게 쌓고 우리 땅을 침범하려 하는데, 이것을 의리라고 할 수 있겠는가?” 임금이 부끄러워 마침내 목책을 헐어버렸다.

여기서 마한왕이 온조를 꾸짖은 웅천(熊川) 목책은 어디를 지칭하는 것일까. 경기도 안성 시 도기동에서는 몇 년 전에 백제 초기 토성지와 그 안에 구축되어 있는 목책(木柵)의 유구가 발견된바 있다. 도기동 유적의 토루도 사산성의 판축 토로와 거의 비슷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안성천 상류(웅천으로도 불림)에 온조가 방어시설을 구축하자 직산의 마한왕은 위기를 느껴 편지를 보내 항의한 것일까.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마한 목지국의 멸망은 온조왕 26년(AD8)의 기사에서 나온다.

7월에 왕은 말하기를 “마한은 점점 쇠약하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의 마음에 틈이 생기니 그 형세가 능히 오래지 않아 반드시 다른 나라의 아우르는 바가 될 것이다. 이는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찬 것 같으니 그때 뉘우친들 소용이 없을 것이다. 이를 취하여 뒷날의 간고를 면하도록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고 하였다. 10월에 왕은 군사를 내어 사냥을 한다고 말하고 가만히 마한을 습격하여 그 국읍을 아울렀으나 오직 원산성과 금현성의 이성은 굳게 지키며 항복 하지 않았다.

이 기록을 토대로 사냥을 한다고 병사들을 일으켜 목지국을 공격했다면 위례성에서 목지국은 멀지 않아야 한다. 목지국의 위치를 예산이나 전남 영산강 지역으로 비정하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따른다.

그렇다면 안성 도기동에 진주했다 일시 철수 했던 백제군이 2년 후에 군비를 강화하여 목지국을 공격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목지국과 인근의 마한 성인 원산성(圓山城) 금현성(金峴城)은 직산과는 그리 멀지 않은 지역으로 봐야 한다.

마한 목지국을 점령한 온조는 잠시 이 성에서 진주하면서 왕도를 지칭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것이 남은 여러 마한국들의 제어를 위해서도 필요했는지 모른다. 온조의 위례성이 직산이라고 한 옛 기록은 여기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평시에는 사산성에서 정사를 보다가 외적이 침입하면 험준한 위례산성으로 피난시키지 않았을까. 온조는 잠시 목지국에서 왕성규모를 갖추는 시기, 인근의 외방성 구축을 강화한다. 그것이 온조왕 36년 기사다. 지금의 온양·천안·조치원·부여 등지에 집중되고 있다.

7월에 탕정성(온양)을 축조하고 대두성의 민호를 나누어 살게 하였다. 8월에 원산성(천안) 과 금현성(조치원)의 두 성을 수리하고 고사부 리성(부여)을 축조하였다(三十六年秋七月 築 湯井城 分大豆城民戶居之 八月 修葺圓山, 錦 峴 二城 築 古沙夫里城).

온조왕 43년 기사를 보면 왕이 8월에 아산원에서 사냥을 했다는 기사가 있다(王田 牙山之 原). 그리고 한해 전에는 한수의 위례성의 중요성에 대비 모든 15세 이상 고을사람을 징발 하여 위례성을 수축했다(發漢水東北諸部落人 十五歲以上 修營 慰禮城)고 한다.

수년을 직산 목지국 고토에 머물던 온조는 한강 위례성이 말갈의 침공으로 위태롭게 되자 위례성을 수축하고 다시 한산(漢山)으로 이도(移都)한 것이 아닌가.

사산성 표지석
사산성 표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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