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장엄하고 정연한 석축

만주 오녀, 환도성 닮은 형태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여주 파사성
여주 파사성

역사의 강이자 아름다운 강

경기도 여주 땅을 지나는 남한강 물길을 여강(驪江)이라고 했다. 제천 월악산에서 발원한 남한강은 강원도 오대산에서 흐른 물을 모아 중원에서 달천을 이룬다. 이 물이 300여리를 흘러 지나는 곳이 바로 여강. 한자 ‘여(驪)’는 ‘검은말 현’으로 이는 검(黔) 즉 ‘크다’는 뜻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여강은 부의 북쪽에 있는데 나룻배가 있다.’고 했다. 이것이 고기에 나오는 최초의 기록이다. 여지승람에는 ‘곧 한강 상류이며 주 북쪽에 있다.’고 하여 여주를 지나는 한강을 여강으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

<대동지지>에도 ‘곧 한강 상류인데 주치(州治)를 감싸 안고 돌아 서북쪽으로 흐른다. 강 가운데 양도(羊島)가 있고 동쪽 연안으로 보은사(報恩寺:신륵사의 다른 이름)가 있다’고 하여 여주를 감싼 물길이 됨을 기록하고 있다.

예부터 여강을 사랑한 문사가 많았다. 고려 주열(朱悅: 고려 원종 대 문신)은 ‘용이 여의주를 암흑 속에서 품고 있는 형상’이라고 노래했으며 이곡(李穀: 고려 후기 문신)은 여강의 경치를 화선지에 담으려면 소동파나 안진경이 아니면 안 될 것이라고 찬탄했다. 그만큼 아름답고 한 폭의 산수화 같다는 말이다.

고려 말 충신인 목은 이색은 자주 배를 타고 강의 경치를 완상했던 것 같다. 목은이 청주옥에 갇힐 때도 이 강을 건넜던 것인가.

병후에 여강을 몇 번이나 왕복하였는가.

높은 시를 화답하려 하니 내 얼굴이 부끄럽네

배 띄워 놀기엔 반 삿대 쯤 물이 가장 좋으니

천겹산은 다 보기 어렵고

밝은 달 맑은 바람은 좌우에서 오는데

흰 수염과 붉은 뺨으로 중간에 앉았네

초연하게 스스로 신선의 경지라

목옹(牧翁)이 한가하지 않은가를 물어보세

- <여지승람 제7권 여주목조>. 관부 청심루

조선 중기 방방곡곡을 여행한 이중환은 <택리지(擇里志)>에다 여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웅장하거나 급하지 않고 마치 호수처럼 잔잔하다. 그 까닭을 강의 상류에 마암과 신륵사 바위가 있어서 그 흐름을 약하게 하는 데에 있다.’

여강은 역사의 강이기도 하다. 이 강을 두고 2000년 전 마한과 백제는 공방전을 벌였다. 그러나 마한은 철기로 무장한 북방세력 백제를 이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청동기와 돌검을 가지고는 신병기를 막을 수 없었던 것이다. 여강의 지배자 백제는 5세기 후반에 이르러 고구려와 사활 걸린 전쟁을 벌이다 장수왕의 침공으로 왕도인 위례성을 빼앗긴다. 그리고 약 80년 동안 여강은 고구려에 의해 지배되었다.

고구려는 이곳을 골내근현(骨乃斤縣)이라고 명명했다. 골내근은 무슨 뜻일까. ‘골(骨)’을 ‘고(高)’로 해석하는 학자도 있으며 ‘홀(忽)’로 보는 경향도 있다. 골을 ‘뭇(束)’ ‘묶음’이라는 뜻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있다. 경기도, 황해도(북한) 일대에 분포된 고구려성에는 대부분 골 홀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買忽(매홀, 수원? 양주?)·上忽(상홀, 경기도 화성)·彌鄒忽(미추홀, 인천)·馬忽(마홀, 포천 반월성)·冬比忽(동비홀, 개성)·買旦忽(매단홀, 황해도 신계)·冬音忽(동음홀, 황해도 연백)·內米忽(내미홀, 황해도 해주)·骨衣奴縣(골의노현, 경지도 남양주)·骨乃斤縣(골내근현, 여주)·梁骨縣(양골현, 포천) 등이 있다.

골내근과 비슷한 이름의 성 이름은 북한에 있다. 평안남도 성천군 성천읍에 있는 ‘흘골산성(訖骨山城)’이다. 흘골산성은 평양 동부의 위성으로서 비류왕국의 송양왕이 축성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총 연장길이는 1340m에 달하며 고구려 왕궁터가 있다고 기재되어 있다. 골내근은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이름이다. 이 성은 또 어떤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것일까.

여주 파사성에서 바라본 여주시 전경
여주 파사성에서 바라본 여주시 전경

마한의 고지 잃어버린 이름

여주의 본래 원주민들은 마한인이었다. 목지국(目支國. 천안 직산)을 종주국으로 섬기며 평화롭게 산 나라였다. 그러면 여주는 마한 54개국 가운데 어떤 이름을 지녔던 것일까. <여지승람>마저 마한과 백제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다.

<위지 동이전>에 있는 마한 기록이다.

‘큰 나라는 만여 가(家), 작은 나라는 수천 가로 호(戶)수가 총 십여 만이다. 진왕(辰王)이 월지국(=목지국)을 다스리는데 신지(臣智)를 따로 우대하여 호칭하였고(加優呼) 신운국의 견지보(遣支報), 안야국의 축지(踧支), 분신리아국의 불례(不例), 구야국의 진지렴(秦支廉)이 그것이다. 그 관직으로는 위솔선 읍군(魏率善邑君), 귀의후(歸義侯), 중랑장(中郞將), 도위(都尉), 백장(伯長)이 있다(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總十餘萬戶. 辰王治月支國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支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 其官有魏率善, 邑君, 歸義侯, 中郞將, 都尉, 伯長).’

여주의 마한국 고지는 어디일까. 가장 유력한 곳이 바로 파사성이다. 여강에 임한 파사성은 동산과 같은 산에 구축된 고대의 성지다. 경기도 여주군(驪州郡) 대신면(大神面)과 양평군(楊平郡) 개군면(介軍面)에 걸쳐 축조되어 있다. <여지승람> 제7권 비고 여주목 성지조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여주 파사성에서 찾은 와편
여주 파사성에서 찾은 와편

파사성(婆娑城) 위치

파사성은 서북쪽으로 40리 되는 소산(小山) 임강(臨江)에 있다. 이 성은 해발 230m의 파사산 정상에 위치하며 축조방식은 테뫼식이다. 길이가 1800m나 된다. 삼국시대 성으로는 작은 규모가 아니다. 산정상부와 계곡을 일부 포함하여 부정형에 가까운 형태로 축성 된 성이다. 현재 사적 제251호로 지정되었다.

백제영토의 대부분 지역에 소재한 마한이 자리 잡은 거소들과 환경이 흡사하다. 글마루 취재반은 성에 올라 마한시기의 유물이 수습되는가를 살폈다. 성안에는 숱한 초기 철기시대의 토기를 비롯하여 유백색의 백제 와편이 찾아진다.

그리고 고구려 와편을 수습했다. 적색의 와편은 이 성에 한때 고구려가 점령, 대대적인 건물구축이 있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혹 이름이나 증거가 되는 명문 와편은 없는 것일까. 성을 한 바퀴 돌면서 놀라고 말았다. 이처럼 고구려 양식이 살아있는 한반도 내의 고구려성은 어디 있을까.

석재를 잘 다듬어 비스듬히 쌓은 장엄한 석벽, 옹성 그리고 평지에서의 성 국축 방법을 확인 하는 순간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지금까지 답사한 여러 고구려 성 가운데 가장 완벽한 것이었다. 지난 달 답사한 양주 대모산성보다도 고구려 성격이 강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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