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홀 고루’인가 붉은 연꽃 막새도 출토

호로고루성 옆 호로강
호로고루성 옆 호로강

임진강을 고대에는 호로강(瓠瀘江)이라고 불렀다. 또는 표강(瓢江)이라 적고 있다.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 강변에는 작은 고성(古城)이 하나있다. 바로 ‘호로고루’성이다. 조선 현종시기 영의정을 지낸 허목(許穆)의 <미수기언(眉叟記言) 무술주행기>에는 “호로 하 석벽 위에 옛 성이 있다. 그리고 이 하천을 따라 고구려와 신라가 접경하고 있었다”고 적혀 있다. 그리고 미수는 다음과 같이 적었다.

날이 저물어 돛을 올리고 호로탄(瓠蘆灘)으로 올라가니 여기가 호로하(瓠蘆河)이고 그 위는 육계(六溪)이다. 또 옛날 진루(陳壘)가 있는데, 앞의 여울은 아주 험하며 사미천(沙彌川)이 여기로 들어온다. 상류에 옛 성이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 대해 있는데 석벽으로 되어 있어 견고하다.

임진강 유역 대표적인 고구려 성을 지칭할 때는 바로 미수가 흥미를 보인 호로고루성을 지목한다. 왜 이 성이 학계의 주목을 받는 것일까. 지난 2000년 발굴시 이 성에서는 가장 완전한 형태의 고구려 와당(막새)이 여러 점 출토됐다. 붉은 색인 이 기와는 평양성이나 초기 수도 중국 지안 국내성에서 많이 찾아지는 형태의 연화문 와당이었다. 작은 호로고루 성에서 왜 궁중이나 절터에서 찾아지는 연화문 와당이 발견된 것일까.

성 안 건축물에 연화문 와당을 사용한 것은 예사롭지 않은 것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상당히 높은 지배계급이 있었거나 성 안에 사찰이 존재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만큼 호로고루 성의 중요성이 인정된다.

막새는 여섯 잎의 연판으로 되어 있으며 사이에 간판을 배치한 릴리프가 강한 전형적 고구려 와당이다. 돌기 된 원형의 자방에 소문대의 주연을 지니고 있는 데다 전형을 따르고 있어 고구려가 임진강을 지배했던 6세기 초반의 와당으로 보인다. 한눈에 봐도 정신이 번쩍 드는 고구려 막새다.

이 호로고루성에서는 이밖에도 중요한 고구려계 철제 유물들이 많이 출토됐다. 중국 고구려 유적인 오녀산성(五女山城)에서 나온 철부(鐵斧, 쇠도끼)와 같은 형태의 유물도 나왔다. 큰 수확은 철제 갑주(甲冑)의 발굴이었다. 이는 고구려 쌍영총, 삼실총, 안악3호분, 통구1호분 벽화에 나오는 경갑을 찬 기마 군사들이 입은 갑주를 확인시켜주는 유물이다. 고구려 전사들이 평소 사용했던 무구들이 어떤 것이었음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했다. 또 ‘상고(相鼓. 손북)’라는 명문이 새겨진 토기 편, 고구려 벽화에 나타나는 고구려인의 절풍형(折風形) 토제 장식도 출토됐다. 금속제보다는 흙을 이용한 유물이 많은 것이 주목된다. 그렇다면 이 성의 고구려 지배는 언제 시작되어 언제 끝난 것인가.

성내 유물로 봐서는 광개토대왕시기보다는 5세기 후반 장수왕대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 같다. 그리고 호로고루성의 최후는 신라 진흥왕대 한산(漢山)을 정복한 신라군이 임진강을 장악하기 위한 최대의 공격 시 빼앗긴 것은 아닐까. 진흥왕은 대당 교역로를 트기 위해 신주(新州)의 군사를 동원, 한산인 아차성에서 임진강 하류에 이르는 고구려 보루 공파에 주력한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한반도에서 가장 정확한 고구려계 유물이 쏟아진 호로고루성을 답사해 본다.

호로고루성 전경
호로고루성 전경

호로고루의 어원

‘호로’는 임진강의 옛 지명이라고 했다. 이 성은 ‘호로’에 고루라는 이름을 붙였다. 호로고루 의 어원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이 부근의 지형이 표주박(瓠) 또는 조롱박 같이 생겨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고을을 뜻하는 홀(忽)과 성을 뜻하는 고루(古壘)가 합쳐서 ‘홀 고루’ 즉 호로고 루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완전한 고구려식 명칭이다. 홀(忽)은 차(此) 혹은 차(次)라고도 쓰여 지며 강원도 양구 고구려 지명에서 예를 보여준다. 그런데 ‘루’라는 표기는 백제에서 많이 쓴 명칭이다.

고구려가 광개토대왕 시기 정복한 백제성 가운데 ‘루(婁)’라는 이름이 여럿 보인다. ‘모루성(牟婁城)’ ‘고모루성(古牟婁城)’ 등이 그것이다. 비문에는 광개토대왕 사후에 이곳에 살던 백 제인들을 왕도 국내성으로 차출, 묘를 지키게 했다(守墓, 수묘)는 내용이 있다. 이를 연호(烟戶)라고 했으며 가구 수는 2~4가구 정도였다. 광개토대왕 비문을 보자.

“대왕이 생전에 교(敎)를 내려 말하기를, ‘선조(先祖) 왕들이 다만 원근(遠近)에 사는 구민 (舊民)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지키며 소제를 맡게 하였는데, 나는 이들 구민들이 점점 몰락하게 될 것이 염려된다. 만일 내가 죽은 뒤 나의 무덤을 편안히 수묘하는 일에는, 내가 몸소 다니며 약취(略取)해 온 한인(韓人)과 예인(穢人)들만을 데려다가 무덤을 수호·소제하게 하라’고 하였다.

왕의 말씀이 이와 같았으므로 그에 따라 한(韓)과 예(穢)의 220가(家)를 데려다가 수묘케 하였다. 그런데 그들 한인과 예인들이 수묘의 예법(禮法)을 잘 모를 것이 염려되어, 다시 구민 110가를 더 데려왔다. 신(新)·구(舊) 수묘호를 합쳐, 국연(國烟)이 30가이고 간연(看烟)이 300가로서, 도합 330가 이다.”

또 광개토대왕이 정복한 백제성 가운데 호로 고루성과 비슷한 성은 구모로성, 고모루성, 각 모로성, 모루성 등이다. 이때 백제와의 전쟁 모습을 광개토대왕 비문은 다음과 같이 기록 한다.

“영락(永樂) 6년 병신(丙申)에 왕께서 친히 군사를 이끌고 백잔국(百殘國)을 토벌하셨다. 고 구려군이 ... 하여 영팔성, 구모로성, 각모로성, 간저리성, ▨▨성, 각미성, 모로성, 미사성, ▨사조성, 아단성, 고리성, ▨리성, 잡진성, 오리성, 구모성, 고모야라성, 혈▨▨▨▨성, ▨이야라성, 전성, 어리성, ▨▨성, 두노성, 비▨▨리 성, 미추성, 야리성, 태산한성, 소가성, 돈발성, ▨▨▨성, 루매성, 산나성, 나단성, 세성, 모루성, 우루성, 소회성, 연루성, 석지리성, 암문▨성, 임성, ▨▨▨▨▨▨▨리성, 취추성, ▨발성, 고모루성, 윤노성, 관노성, 삼양성, 증▨성, ▨▨노성, 구천성 … 등을 공취(攻取)하고, 그 수도(首都)를 … 하였다. 백잔(百殘)이 의(義)에 복종치 않고 감히 나와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를 건너 정병(精兵)을 보내어 그 수도(首都)에 육박하였다. (백잔군이 퇴각하니 … ) 곧 그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잔주(殘主)가 곤핍(困逼)해져, 남녀(男女) 생구(生口) 1000명과 세포(細布) 1000필을 바치면서 왕에게 항복하고, 이제부터 영구히 고구려왕의 노객(奴客)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 태왕은 백잔주의 잘못을 은혜로서 용서하고 뒤에 순종해 온 그 정성을 기특히 여겼다. 이에 58성 700촌을 획득하고 백잔주의 아우와 대신 10인을 데리 고수도로 개선하였다.(원문 생략)”

어쨌든 이 시기 호로고루성은 백제에서 고구려로 지배권이 넘어간 듯하다. 그러면 이 성에서 백제적인 요소는 무엇일까. 성터 발굴 조사보고서를 보면 모두 네 차례에 걸쳐 보수한 흔적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성의 기저에는 판자를 측면에 대고 성을 쌓는 초기 백제계의 판축(版築)이 나타났다. 여기서는 백제 초기 양식인 목책 시설도 찾아졌다. 이는 백제 초기 백제성인 몽촌토성, 하남 춘궁리 유적, 안성 도기동 유적에서 보이는 축성 방식이다.

그 다음에 나타나는 것은 판축 바깥에 비스듬히 돌을 쌓고 자갈로 다진 고구려계의 석축(石築)이다. 필자는 양구 비봉산성, 포천 반월성, 충주 장미산성, 단양 적성 등지에 이 같은 양식을 확인했다. 그리고 석축 바깥쪽 하단에 돌 기단을 쌓은 신라계의 축성법을 보여 준다. 이를 감안하면 초축(初築)은 백제에서 했으나 고구려·신라가 그 다음 주인으로 이용했음을 알려준다.

호로고루 성
호로고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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