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남방 공격의 대로 철옹성 그대로 남아

불곡산에 보루성… 큰 테미 새 발견 마한 유적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양주 대모산성 성벽
양주 대모산성 성벽

경기도 양주시는 잘 알려지지 않은 고구려 유적의 보고(寶庫)다. 백석읍 어둔동 속칭 성골에 있는 ‘대모산성(大母山城, 사적 제526호)’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지척의 거리에 고구려 유적이 가장 많이 자리 잡고 있다. 유적은 대부분 성지, 보루(堡壘)다. 왜 이곳에 고구려 보루 등이 집중되어 나타나는 것일까.

양주시는 북으로는 ‘동두천-연천’으로 통하는 주요 길목이다. 특히 남쪽으로는 한산(漢山, 아차산)과 직선도로로 연결된다. 4~5세기 고구려 광개토대왕이나 장수왕이 백제왕도 위례성을 공격했을 당시 남하루트였다. 서울과의 거리는 56리(약 22㎞)로 옛날 도보로도 하루에 닿을 수 있었다.

<동국여지승람> 권 제11권 양주목(楊州牧) 기록을 살펴보자.

“동쪽으로 포천현 경계까지 25리이고 같은 현 경계까지 22리가 된다. 가평현 경계까지는 29리이고 광주부 경계까지 75리다. 북쪽으로는 적성현 경계까지 22리이고 마전군 경계까지 58리이며 연천현 경계까지 74리인데 서울과의 거리는 56리이다.”

고구려는 교통의 요충인 양주를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여겼다. 대모산성을 중심으로 주변의 산세는 흡사 항아리 입 모양을 이루고 있다. 남쪽으로는 호명산(425m), 흥복산(463m), 동쪽으로는 천보산(335m), 북으로는 불곡산(佛谷山, 450m)이 옹립하고 있다.

고려 말 목은 이색(牧隱 李穡)은 양주 산악 풍경(見州 가는 도중에)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깎아지른 듯한 세 영이

푸른 하늘에 꽂힌 듯한데

가파른 길이 얼어붙어 말이 못가네

(截然三嶺揷靑天 峻路長氷馬不前)

고구려가 양주에 대규모 관방유적을 구축한 것은 이곳의 산세가 험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단 유사시 고구려 군사들은 치소인 대모산성이 점령당할 위기에는 산성으로 피신하기가 용이하다. 그동안 불곡산에서만 9개의 고구려 유적인 보루가 조사되었다.

한강변 일대의 고구려 보루 유적 중 가장 많은 곳이 광나루에 있는 아차산이다. 그런데 양주시의 경우 그 숫자를 넘고 있다. 그리고 천보산과 회암산에서도 보루 유적이 조사되었다. 앞으로도 조사되지 않은 새로운 보루 유적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양주는 고구려 지배 이전에는 마한, 백제의 강역이었다. 인근의 포천(馬忽, 반월성)과도 같았다. 대모산성을 조사하면서 극명하게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마한 시기까지 올라가는 고식의 판축성이 찾아지고 그 위에 철옹성 같은 고구려식 석축성을 확인했다.

양주 대모산성도 포천의 반월성, 충주 장미산성, 직산 사산성 등과 더불어 남한 지역 고구려 산성의 대표적 사례로 들고 싶다. 보존상태도 아주 좋다. 오늘은 마한과 백제 고구려 신라의 역사가 점철된 유적의 보고 양주시를 가본다.

양주 대모산성 성벽(북문지 옆)
양주 대모산성 성벽(북문지 옆)

고구려의 ‘매성’ ‘창화군’

<동국여지승람> 권 11에는 양주의 고구려 시기 지명이 ‘매성(買省)’ 혹은 ‘창화군(昌化郡)’이었다고 기록된다. 신라의 영토가 된 뒤에 내소군(來蘇郡)으로 고쳤다(本 高句麗 買省郡 一云 昌化軍 新羅 景德王 改 來蘇云云).

언어학자들은 ‘매성’을 마홀(馬忽)과도 관련이 있다고 해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인근 포천에 있는 반월성 고구려 성지 ‘馬忽’과도 연관이 있는 것인가. 매(買)는 <삼국사기> 지리지에 ‘물(水)’로 표기되어 있다. ‘홀’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골’의 음전(音轉)으로 ‘고을’ 혹은 ‘성’을 뜻한다. 매(買)가 물을 뜻하고 홀이 성(城)을 나타내므로 ‘물가의 성’ 또는 ‘물가의 마을’이라는 뜻을 가진다. 그래서 경기도 수원의 고 이름인 ‘모수’의 ‘모’와 ‘매홀’의 ‘매’는 음이 비슷하기 때문으로 매성을 이곳으로 해석하는 경향도 있다.

‘모수국(牟水國)’은 중국 지안 광개토대왕릉비에 보이는 백제로부터 정복한 성 가운데 하나인 모수성(牟水城)에 해당된다. 그런데 모수성과 같이 비문에 나오는 성들이 대부분 한강 이북에 걸쳐있는 성들이다. 구모로성, 약모로성, 간저리성, 모수성, 모로성(臼模盧城, 若模盧城, 幹氐利城, 牟水城, 牟盧城)이다. ‘약모로(若模盧)’는 옛 표기로 ‘소모로’, ‘모로성(牟盧城)’은 그대로 ‘모로골’이므로 각각 경기도 연천군 삭녕면의 ‘승량’과 경기도 포천 또는 양주의 일부가 된 ‘견주(見州)’로 비정되고 있다.

필자는 광개토대왕 비문에 보이는 백제 모수성이야 말로 양주로 비정하고 있다. 이 문제는 앞으로 이 지역에 대한 지표조사와 학술 논문을 통해 규명할 예정이다.

백제 이전 마한 ‘모수국’

‘모수국(牟水國)’은 마한 54개국 중 하나였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韓條)에는 삼한에 대한 소개와 함께 마한의 소국 이름이 열거되어 있다. 마한 54개국은 현재의 경기도·충청도·전라도에 분포하였으며 모수국은 원양국(혹은 애양국. 필자는 지금의 청주시 부모산(애양산) 아래 비하리로 비정) 다음으로 두 번째로 기록된다.

爰襄國·牟水國·桑外國·小石索國·大石索國·優休牟涿國·臣濆沽國·伯濟國·速盧不斯國·日華國…

(원양국·모수국·상외국·소석색국·대석색국·우휴모탁국·신분고국·백제국·속로불사국·일화국…)

사실 한강유역에서 있던 백제국도 마한의 일국이었으며 북쪽에서 온 부여계 온조가 이곳 땅을 빌어 살다 나라를 일으켜 세운 것이다. 모수국이 동이전 한조 머리 부분에 기록되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세력이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양주시에서 마한의 유적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백석읍 평지에 구축된 대모산성은 마한과 백제, 고구려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비밀의 성지다. 왜 이곳 성을 ‘대모산성’이라고 부른 것일까. ‘큰 성’ ‘한메성’ 즉 읍성, 치소였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왕성이나 큰 성을 ‘大母山城’으로 부르거나 표기했다(글마루 2019. 11월호 진천 대모산성 참고).

글마루 취재반은 대모산성을 답사하면서 매우 주목되는 사실을 확인했다. 마을에서 성지로 올라가는 입구 경작지에서 매우 큰 고인돌을 확인했다. 정방형의 고인돌은 인위적으로 커다란 바위 위에 올려놓아져 있다. 고인돌은 청동기 부족장의 유물이다. 이를 보면 백석읍 일대의 평야를 다스렸던 마한의 치소로도 이곳을 지목할 수 있다.

그리고 대모산성은 삼국기 초기 토성과 판축성이 혼재 한 가운데 구축된 것임을 확인했다. 그러니까 마한에서 초축된 성지를 백제시기 판축성으로 구축한 다음 고구려 점령 시기인 4~5세기에는 견고한 석성으로 다시 보축한 것이다.

대모산성의 초축 형태는 춘천 우두산성, 안성 도기동 산성, 진천 대모산성 등 초기 철기시대인 마한 유적을 방불하고 있다. 산 위를 평평하게 만들고 외면은 삭토(削土)하여 적들이 성을 공격하는 데 어렵게 만들었다. 제일 윗면에는 흙을 다져 쌓고 간혹 판축에 이용된 할석이 나타난다. 할석을 넣고 다져 쌓은 것은 백제 축성방법이다. 이곳에서 작은 파편이지만 조질 연질토기 조각을 찾았다. 모래가 많이 섞인 이 토기 잔해는 대모산성의 초기 역사를 말해주는 것이다.

고구려는 백제의 판축성을 가지고는 신라 세력을 방어할 수 없음을 알고 이곳에 요새를 구축한다. 그것은 돌을 잘 다듬어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을 구축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많은 돌을 어디서 조달한 것일까. 주변에는 평지이며 석재가 나는 것이 없다. 고구려 군사들은 불곡산 혹은 천보산에서 돌을 실어 나른 것일까.

양주 대모산성 입구에 있는 고인돌
양주 대모산성 입구에 있는 고인돌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