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부터 월간 글마루에서 연재하고 있는 ‘남한지역 고구려 유적 답사’ 시리즈를 천지일보 온라인을 통해 선보입니다. 우리의 역사를 알고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과거 연재시기와 현재 노출되는 기사의 계절, 시간 상 시점이 다소 다른 점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글 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사진 글마루 

주변 절터엔 고구려 일광삼존불

구녀산성 오르는 길
구녀산성 오르는 길

구녀산성 축성설화

청주시 초정 약수터 뒤 산에 속칭 ‘구녀산성 (九女山城)’이 있다. 왜 구녀산성이라고 한 것일까. 이 성에는 10남매에 얽힌 축성설화가 전해 내려온다. 남매 축성설화가 아닌 9녀 설화이니 숫자상으로는 가장 많다. 설화를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산성마을에 딸 아홉과 아들 하나를 둔 홀어머니가 살았는데 모두가 힘이 장사였다. 어느 날 스님이 그 집을 찾아와 아들이 액운이 들어 얼마 못 살 것이라고 점을 쳤다. 홀어머니는 노승을 붙들고 액운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느냐고 묻자 노승은 난감해하면서 아들을 살리려면 딸 아홉을 모두 죽여야 한다는 처방을 알려주었다. 홀어머니는 오랫동안 고민한 끝에 아들을 살리기 위한 내기를 하게 되었다. 아들에게는 송아지를 끌고 서울을 다녀오게 하고 딸들에게는 성을 쌓게 하였다. 아들이 쉽게 이기리라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아홉 명의 딸들이 성을 거의 완성하게 되었다. 이제 성돌 하나만 얹으면 게임은 끝이었다. 홀어머니는 노심초사하여 머리를 짜냈다. 뜨거운 팥죽을 끓여놓고 딸들을 불러 이제 성을 다 쌓았으니 음식을 먹고 나머지를 완성하라고 권유했다. 딸들이 뜨거운 팥죽을 빨리 먹지 못하고 후후 불면서 먹고 있는 중에 아들이 집에 도착하였다. 그래서 딸 아홉은 죽임을 당하여 구녀성 안쪽에 묻혔다(<청주시지> ‘설화’ 조 종합). 이는 전통적 남아선호사상을 말해주는 혈육 경쟁의 비극사다.

필자는 초등학교 4학년까지 구녀산성 아래에 있는 청원구 비상초등학교에 다녔다. 초등학교 1학년부터 4년 동안 봄 소풍 때는 내리 구녀산성을 올라갔다. 어린 시절 오르기에 벅찬 산 성이었으나 기억으로는 전혀 힘들지 않았다. 고색창연한 돌무더기와 이름 모를 야생화들의 향기가 아직도 코끝에 생생하다. 고적을 조사하고 답사하는 재미가 이때부터 생긴 것인가.

구녀산은 청주시의 동쪽 미원면 대신리 종암리와 내수읍 우산리의 경계에 걸쳐 있다. 이곳은 본래 구라산(句羅山, 혹은 謳羅山)이라고 불렸다. 해발 497m의 구라산 정상에 걸쳐 축조된 포곡식 산성이며 혹은 고려산, 궁예산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구라산(謳羅山)이 주의 동쪽 41리에 있다.’는 기록과 동일 문헌에 ‘구라산성은 돌로 쌓았고 둘레는 2790자이며 안에 우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허물어졌다.’는 기록이 있다. <청원군지>에 의하면 이 산은 원래 ‘구려산(句麗山)’ ‘구라산(謳羅山)’ 등으로 불렸다는 것이다. 그런데 영해객(嶺海客)이란 인물이 쓴 등 시(登詩) 시구에 ‘구녀사시구려사 구려성시구녀성(九女寺是句麗寺 句麗城是九女城)’ 구절이 전해내려 온다. 이 시로 미루어 ‘구려사, 구려성’이 구녀성 전설과 연관지어 ‘구녀사, 구녀성’으로 불리게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청주 인근 고대 유적 중 이처럼 고구려식 지명을 가지고 있는 유적은 드물다. 특히 ‘구녀성’이라고 작명된 곳은 이곳 성이 유일하다. 오늘은 고구려설화가 전해 내려오는 청주 구녀산성과 주변 일대의 유적을 여행해 보자.

구녀산 정상
구녀산 정상

고구려성 ‘구려성’ 의 음운이화

구녀성은 본래 ‘구려성(句麗城)’의 음운이화로 보인다. 고구려는 성(城)을 ‘구루(溝漊)’ ‘홀 (忽: khol)’이라 불렀다. 읍(邑), 동(洞), 곡(谷) 등을 나타내는 ‘고을’과 비슷한 말이다. ‘고구려’는 ‘구려’에 ‘크다’ ‘높다’는 뜻의 ‘高’ ‘大’를 덧붙인 말로서 ‘큰 고을’ ‘높은 성’이란 뜻이다.

5세기 중엽 이후로는 ‘높고 빼어나다’는 한자의 뜻을 살려 ‘고려(高麗)’를 공식 국호로 삼았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는 왕씨 고려와 구분하기 위해 기록에 등장하는 고(구)려를 모두 고구려라 기술하였다.

고구려 성장의 비밀은 ‘구려’에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주몽이 소서녀의 지원에 힘입어 급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구려의 왕권과 영토를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망명한 지 2년 만에 역사적인 ‘구려’를 세웠다. 그것은 그가 구려왕의 사위가 돼 구려 왕이 죽자 왕권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구려’가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알려주는 사료는 많다.

<후한서> 예전에서는 ‘예, 구려 및 옥저는 다 본래 조선 땅이었다’고 구려의 존재를 밝히고 있다. <한서> 권28 지리지 현도군 고구려 현조에 대한 후한 말 응소의 주석에서 ‘옛 구려호 (호는 이민족에 대한 비칭)’라고 했다. 고구려가 구려의 왕권을 이어받아 구려 국호에 ‘높을 고’자를 덧붙였다고 밝히고 있다. 또 <상서> 권 11 주관에 대한 주석에 ‘해동의 여러 이족들인 구려, 부여, 한, 맥’이 주나라 성립시기 중국과 통했다는 기사가 있다. 일주서 왕회해편에 성 주(주나라 동도 낙양)의 낙성식에 ‘고이’가 축하하러 왔다고 했는데 진나라 사람 공조가 ‘고이는 곧 고구려(구려를 지칭)다’라고 한 데서도 알 수 있다.

고구려 강력한 세력이 남하했을 때 청주, 청원은 이들 세력이 장악하게 된다. 소백산 준령과 가까운 청천, 미원, 구녀성, 초정, 도안, 괴산, 음성, 충주를 잇는 광역 지배권이 형성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멀리서 바라본 구녀산성
멀리서 바라본 구녀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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