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 문화칼럼니스트

 

과거제도는 갑오개혁으로 폐지될 때까지 조선시대 최고의 인재 등용문이었다. 과거에 합격하기만 하면 벼슬을 얻고 떵떵거리며 살았다. 초시나 진사만 되어도 뒷짐을 지고 유세를 떨었다. 선비들은 누구나 과거 시험에 매달렸다. 젊었을 때 합격해서 영감님 소리 들으며 영광을 누린 사람도 있었지만, 평생 공부만 하다 죽은 이들도 많았다. 과거에 합격하지 못해 벼슬을 못한 사람은 묘비에 학생이라 새겼다.

그렇다고 게나 고둥이나 누구나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문과(文科)는 양반집 자제 아니면 응시할 수 없었고, 무과(武科)는 천민만 아니면 누구나 도전할 수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다. 잡과(雜科)는 집안 대대로 기술직을 물려받은 중인(中人)들에게만 기회가 주어졌다. 잡과에 합격하더라도 문과 급제자가 받는 벼슬은 할 수 없었다. 서자(庶子)들도 차별을 받아 문과에는 아예 응시하지 못했다. 

소설 속 홍길동은 서자로 태어난 탓에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한다고 한탄했다. 홍길동은 호형호제(呼兄呼弟)는 말할 것도 없고 과거에 응시해 벼슬길에 나서는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노비와 백정, 재인, 기생, 승려, 무당, 상여꾼 같은 천민들은 과거는커녕 글도 읽지 못하게 했다. 철저하게 신분을 나누어 가진 자는 기회를 독점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기회가 원천봉쇄 됐다.   

과거시험 부정을 막기 위한 장치도 있었다. 시험 장소를 나누어 같은 문중의 감독관 아래서 시험을 볼 수 없도록 했다. 이것을 상피(相避)라고 했다. 감독관이 응시자의 정체를 알 수 없도록 시험지에 이름을 가리도록 했다. 유교 경서를 암송하고 강론하는 시험을 치를 때는 채점관과 응시자 사이에 장막을 쳐 서로 못 알아보도록 했다.

그럼에도 부정이 끊이지 않았다. 실력 있는 선비를 매수해 함께 시험장에 들어가 답안지를 바꾸기도 하고, 담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선비에게 문제를 알려 주어 대신 답을 쓰게 한 다음 머슴이 가져오게 했다. 감독관이 자격이 되지 않는 응시자의 답안지를 합격자 명단에 슬쩍 끼워 넣기도 했다. 권세 있는 집안 자식들 몫은 따로 챙겼고, 같은 집안이나 문벌의 자제들을 합격시키려고 온갖 수를 다 썼다.

저 멀리 지방에서 괴나리봇짐을 지고 목숨 걸고 서울로 올라와 과거 시험장에 도착한 시골 선비는 기가 찼을 것이다.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고 노력을 많이 해도 부정한 서울 양반가 자식들을 이길 방도가 없었다. 이것을 깨달은 선비들은 과거를 포기하고 고향에서 훈장노릇이나 하면서 한을 달랬다. 홍경래는 과거에 나섰다가 부당하게 낙방하자 난을 일으켰다.

세월이 흘러 세상이 밝아졌다고 하지만, 시험 부정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교사가 쌍둥이 딸들에게 시험문제를 유출했다가 적발되기도 하고, 가짜 서류로 인류 대학에 들어가기도 한다. 미국 대학 시험에서 대한민국 최고 대학을 나온 부모가 힘을 합쳐 자식을 도와준 일을 두고서도 옳다 그르다 말이 많다. 세상 공평하지 않은 것은 조선시대 그대로다. 평등, 공정, 정의, 세상 아름다운 말들이 공허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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