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문화칼럼니스트

 

백년 전 서울에는 초가들이 즐비했다. 서울의 집 열 채 중 일곱은 초가였고, 기와집이 둘, 반기와집이 한 채 정도였다고 기록돼 있다. 1888년 서울에 처음 온 미국의 언더우드 부인은 서울이 마치 거대한 버섯처럼 보였다고 했다. 서울에 있는 대부분이 초가였다. 돈만 있으면 신분에 상관없이 크고 화려한 기와집을 지을 수 있었다. 갑오개혁으로 신분제도가 폐지되면서 집의 규모나 형태에 대한 규제가 사라졌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선보인 양옥은 1884년 인천에 세워진 세창양행 사택이라고 한다. 건평 170평 남짓에 이층 벽돌집으로 외벽은 회칠하고 지붕에는 붉은색 기와를 얹었다. 이때부터 집을 지을 때 콘크리트와 시멘트, 유리, 벽돌 같은 것들이 쓰였고 스팀 난방이 보급되기 시작했다. 이화학원에서는 정동에 있던 호텔을 매입해 기숙사로 썼는데, 이곳의 스팀 난방이 골칫거리였다. 일부 학부모들이 스팀 난방에서 나오는 쇳김이 음기를 쇠하게 해 여학생들이 불임증에 걸릴 수 있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개인의 주택으로서 우리나라 최초 양옥은 1912년 지어진 대원군의 손자 이준용의 집이었다. 운현궁 안에 있던 이 집은 친일인사 윤덕영의 별장과 함께 일제 강점기 최고의 양식 건축물로 꼽혔다고 한다. 거실에는 벽난로가 있고 커튼이 달린 창문과 샹들리에로 화려함을 뽐냈다. 당시 일본인들이 밀려들면서 일본식 주택도 많이 등장했고 일본인들의 거주지도 서울 전역으로 확대됐다.

1920년대 한글학자 최현배 선생은 우리 민족은 집안 구조 때문에 건강하지 못한 삶을 산다고 지적했다. 선생은 집을 높게 짓고, 부엌 가까이 식당을 만들어 밥을 먹고, 독상을 따로 받지 말고 가족과 함께 식사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부합하는 것이 개량한옥이었는데, 공간을 많이 차지하는 사랑과 문간방이 사라지고 대신 창이 커지고 대청마루에 유리문이 달리기 시작했다. 개량한옥은 판매를 위한 집으로 많이 지어졌다.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이 끝난 뒤에도 주택문제는 나아지지 않았다. 1960년대와 1970년대만 해도 나무와 연탄을 때는 집이 많았다. 도시에서는 나무 대신 연탄을 연료로 사용하게 되면서 연탄가스로 목숨을 잃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겨울을 앞두고 연탄 업자들이 연탄 생산을 줄이는 바람에 주부들이 연탄을 사기 위해 길게 줄을 서야 했던 일도 있었다.

1970년대 들어 아파트가 본격적으로 지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1970년 4월 서울 마포구 창전동의 와우 아파트가 붕괴한 사고는 두고두고 사람들 마음을 아프게 했다. 부실 졸속 공사로 인해 아파트가 무너지는 바람에 33명이 목숨을 잃고 39명이 부상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아파트를 지을 때 철근을 제대로 넣지 않아 무게를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아파트의 역사는 현재도 진행형이다. 누구에는 황금을 낳은 거위가 되는가 하면, 또 누구에게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남의 나라 이야기가 되고 있다. 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변한 게 하나도 없다. 세상이 변하고 살기가 좋아졌다고 하지만 집으로 인한 고민은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 집 걱정 없이 사는 세상이 빨리 좀 왔으면 좋겠다. 또 새해가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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