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문화칼럼니스트

 

요즘 베트남 사람들, 참 살 맛나겠다. 축구만 했다 하면 온 나라가 난리가 난다. 박항서 매직이 베트남을 축구의 나라로 만들고 있다. 온 국민이 축구 하나로 한 덩어리가 되고 있다. 편 갈라 싸울 일도 없고 아파트 값 치솟는다고 걱정할 일도 없다. 축구 하는 날만 되면 밤새 오토바이 타고 달리며 부부젤라 불어 재낀다. 진짜 부럽다. 우리도 저렇게 신난 적이 있었다. 벌써 아득한 시절 같지만, 17년 전 2002년 월드컵 때 꼭 저랬다. 거리가 붉은 색 물결로 넘쳤고 밤새 ‘대~한민국’을 외쳤다. 그렇게 국민들이 스스로 축제를 즐긴 건 아마 처음이었을 것이다. 그때 매직의 주인공은 히딩크였다. 히딩크의 애제자였던 박항서 감독이 다시 매직의 주인공이 되었다. 그 스승에 그 제자다. 좋은 스승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베트남이 동남아시안(SEA) 게임에서 우승한 뒤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 정신으로 이길 수 있었다”고 말했다. 베트남 정신이 무엇일까. 우리한테도 없고 일본에도 없고 중국이나 미국에도 없는, 오직 베트남에만 있는 무슨 특별한 정신이 있는 것일까. 정신이 중요하다는 말이겠지만, 아무튼 우리가 이제는 잊고 있는 그 정신이라는 것이 분명 있을 것이다.

김일이 박치기로 일본의 안토니오 이노키를 제압하거나 서양의 덩치 큰 선수를 때려눕히면 박수를 치며 즐거워했던 시절이 있었다. 흑백 TV 속 외국 선수의 찢어진 머리에선 피가 솟구쳤다. 함께 피를 흘린 김일도 챔피언 벨트를 허리에 차고 두 손을 번쩍 들어 보였다. 다음 날 아이들은 학교에서 하루 종일 전날 밤 보았던 레슬링 이야기를 하였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샌드백을 두드린 끝에 세계 챔피언이 되었다거나, 소매치기로 불우한 삶을 살았으나 복싱으로 새로운 삶을 살게 됐다는 인간승리의 주인공도 있었다. 경기가 끝나고 얼굴이 일그러진 선수가 글러브 낀 손으로 각하의 전화를 받는 모습이 흑백 TV로 전국에 생중계되기도 했다. 각하의 영광이 곧 나라의 영광인 시절이었다. 국민들을 즐겁게 했던 프로 레슬링이 어느 날 순식간에 사라졌다. 진짜 싸우는 줄 알고 손에 땀을 쥐고 용을 썼던 레슬링이 알고 보니 짜고 치는 것이었다고, 어느 유명 프로 레슬러가 말하는 바람에 산통이 깨지고 만 것이다. 그로부터 김일도 무대 저편의 전설로 남게 되었고, 프로레슬링도 흘러간 서커스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일본 선수의 머리에 알밤을 먹이던 여금부나 박치기를 꽂아 넣던 김일의 모습은 두고두고 추억으로 남았다.

이제는 배고픔을 참으며 복싱을 하려는 사람도 없고, 못 먹어서 기운이 달려 경기에 졌다는 이야기도 없다. 돌이켜 보면 맨주먹, 맨발의 청춘, 혹은 맨몸뚱이 같은, 아무 것도 가진 게 없었지만,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들러붙어 마침내 쟁취하고 성공하는 주인공들을 보면서 함께 힘을 냈던 것 같다.

많이 풍족해졌다. 그럼에도, 그때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는,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 정신이라고 하는, 바로 그 무엇이 이제는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다. 때로는 그것이 좀 있었으면 싶을 때도 있다. 내년에는 우리에게도 매직이 좀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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