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작가/문화칼럼니스트

 

‘강화오일장 꽃팬티 옆에/ 빨간 내복 팔고 있소// 빨간 내복 사고 싶어도/ 엄마가 없어서 못 산다오// 엄마를 닮은/ 늙어가는 누나도 없다오// 나는 혼자여서/ 혼자 풀빵을 먹고 있다오// 빨간 내복 입던/ 엄마 생각하다 목이 멘다오.’

공광규 시인의 시 ‘빨간 내복’이다. 요즘은 보기 어렵지만 빨간 내복이 크게 유행한 적이 있다. 첫 월급을 받으면 부모님에게 빨간 내복을 사 드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다. 많은 색깔 중에 왜 하필 빨간 색인지 누구도 설명해 주지 않았고 누구도 묻지 않았지만 아무튼 내복하면 빨간 내복이었다.

빨간 내복은 그러니까 가난하던 시절 입던 옷이었다. 그러니 빨간 내복 하면 콧날이 알싸해지는 것이다. 김장을 하고 연탄을 채워 넣으면 비로소 겨울 채비가 끝났다며 안도하던 시절이었다. 추운 한 철을 버틸 내복까지 마련됐다면 금상첨화다. 그래서 겨울이 오면 어른들 내복 챙기는 것이 사람 사는 도리였다.

형편이 되는 집 아이들은 잠옷이 따로 있었지만 대개의 집안에서는 내복이 아이들 잠옷이었고 실내복이었다. 잠옷 바람으로 뒹굴다 한 이불 속에서 형제들과 나란히 누워 얼굴만 빼꼼히 내밀고 잠을 잤다. 내복 소매가 짧아져 팔뚝 위로 당겨 올라가고 무릎이 튀어나오고 목이 늘어질 때까지 입었다. 그마저도 동생이 있으면 물려 입었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걸레로 변신해 집안 곳곳의 먼지를 훔치는 데 쓰였다. 내복의 쓰임새가 그랬다. 헐어빠진 내복 한 자락도 귀한 시절이었다.

이제 누구나 내복을 입는 세상이 됐다. 첫 월급 받아 부모님께 내복 사드리는 일도 별로 없다. 하지만 어려운 시절을 살아본 사람들은 아직도 부모님 댁에 보일러도 놓아 드리고 내복도 사 드린다. 자식들 내복 챙기느라 부모들은 내복 한 벌 없이 혹독한 시절을 견뎠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내복은 부모님을 사랑하는 마음이다. 겨울에도 집안에 더운 바람이 팡팡 터져 나오는 세상이다. 내복이 예전처럼 그렇게 필요하지 않게 됐다. 내복을 입더라도 이왕이면 가볍고 맵시 나는 것을 찾는다. 발열 내복이라 해서 입기만 하면 저절로 열이 나와 온몸이 따뜻해진다는 기능성 내복도 있다. 얼어 죽지 않으려고 입었던 내복이 패션과 기능성을 갖지 못하면 외면당하고 마는 것이다.

해마다 겨울이 오면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연탄이나 김장, 내복을 챙긴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하지만 요즘은 이런 소식 듣기 힘들다. 세상 돌아가는 것이 워낙 험하고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이 많아서 그렇겠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참 많이 각박해진 것은 분명하다.

올해는 겨울 초입에 난데없이 내복거지 소리가 나왔다. 일본 의류 브랜드가 내복 무료 마케팅을 하자 서로 먼저 갖겠다며 한바탕 난리를 친 모양이다. 내복을 사겠다며 줄을 선 사람들의 모습이 언론을 통해 공개됐다. 국민의 자존심을 뭉갠 내복거지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된다고 말릴 수도 없는 노릇이고, 우리끼리 이러는 것이 참 낯이 뜨겁다.

삭막한 세상이다. 마음이라도 따뜻해야 견딜 수 있다. 마음의 내복이 필요하다. 진짜 겨울이 왔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