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대일본제국 정부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확실히 보증한다(한일의정서 제3조).” 러일전쟁이 시작되자 일제는 한국을 압박해 1904년 2월 <한일의정서>를 체결한다. 겉으로는 동양의 평화(1조), 한일 양국의 친선과 우의(2조)를 내세우고 있지만 실상은 전쟁수행을 위한 병참기지가 핵심이다. 제4조에 일본의 ‘필요한 조치’와 군사기지(군략상 필요한 지점) 이용을 적시한 것이다. 용산에 일본군 기지가 들어설 수 있었던 근거가 되었다.

심지어 <한일의정서> 제5조에는 한일 양국의 승인 없이 이 조약의 취지에 어긋나는 협약을 제3국과 맺을 수 없다는 조항까지 집어넣었다. 조선 왕실이 외교적으로 옴짝달싹도 못하게 손발을 묶은 셈이다.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이듬해인 1905년 9월 5일 ‘러일 강화조약(포츠머스 조약)’을 맺었다. 제1조에는 한국에 대한 일본의 ‘보호권’을 명문화시켰다. 일제는 대한제국의 독립과 영토보전을 확실히 보증한다는 <한일의정서>를 체결한지 불과 1년 7개월 뒤에 그 약속마저 뒤집고 한국을 사실상 ‘지배’하게 된 것이다.

일제의 한국 침략정책은 신속하고 치밀했다. 그 배후에는 바로 미국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은 러시아의 영향력 확대에 상당한 부담을 갖고 있어서 일본을 통해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차단코자 했던 것이다. 러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가자 루스벨트(Theodore Roosevelt) 대통령은 서둘러 미국 포츠머스로 양국 대표단을 불러 강화회의를 추진했다. 일본의 한국 지배가 사실상 명문화 된 포츠머스 조약 제1조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루스벨트 대통령은 포츠머스 조약을 이끌어 낸 주역에서 한 발 더 나아갔다. 자국에서 러일 강화회의가 열리자 마침 필리핀을 방문하는 태프트(W.H.Taft) 육군성 장관을 특사로 임명해 일본을 방문케 한다. 태프트는 곧장 일본으로 가서 카쓰라 다로(桂太郞) 총리와 비밀리에 그 악질적인 ‘카쓰라-태프트 밀약(Taft–Katsura agreement)’을 맺었다. 1905년 7월 29일의 일이었다. 핵심은 일본이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며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한다는 내용이다. 러일 강화조약이 논의되는 그 와중에 미국이 먼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한 것이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작업이었다. 이는 일제의 침탈에 투쟁하던 한국의 등 뒤에서 칼을 꽂은 배신행위에 다름 아니다.

카쓰라-태프트 밀약 이후 일제의 침탈은 더 노골적이고 전면적이었다. 청나라와 러시아가 뒤로 빠지고 영국 등이 방관하는 사이 미국의 내밀하고도 적극적인 지지를 업은 일제는 총칼을 앞세우고 무자비하게 한국의 주권과 영토를 유린했다. 1905년 11월 한국의 외교권부터 빼앗은 ‘을사늑약’은 공식 신호탄이었다. 한국의 외교권이 상실되자 제일 먼저 한국과의 외교관계를 끊은 나라도 미국이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직접 일본 공사에게 주한 미국공사관을 철수시킬지를 물을 정도였다. 평소 한국에 대한 악담과 폄훼, 오해와 무지로 가득 찼던 루스벨트에게 한국은 이미 ‘나라’가 아니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당시 고종을 비롯한 지배층은 미국과 루스벨트 대통령의 정체를 몰랐다. 미국인 외교고문 스티븐스(D.W.Stevens)가 얼마나 악질적으로 일본 편을 들고 있으며 미국 조야에 한국에 대한 저주와 악담을 퍼붓고 있는지도 몰랐다. 오죽했으면 스티븐스가 3년 뒤 미국 캘리포니아 오클랜드 역에서 전명운, 장인환 열사에 의해 총살되었겠는가. 그만큼 고종은 무능했고 무지했으며 지배층은 무기력했다. 정세변화에 먼저 눈을 뜬 쪽은 친일 앞잡이들이었으며 이후 한국은 그들의 세상으로 바뀌고 말았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최근 일본의 무역보복 파장이 연일 확산되고 있다. 증시에 비상 신호가 켜지고 환율이 급등하면서 경제의 불확실성도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정부는 정부대로, 기업은 기업대로 후속 대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당분간 뾰족한 대책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일본 아베 정권의 오만하고 시대착오적인 무역보복에 우리가 순순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다. 이미 100년 전의 한국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들불처럼 번지는 국민의 자발적인 일본산 불매운동은 한 줄기 희망이다. 국민적 지혜를 모으고 기업이 앞장서고 정부가 뒷받침 할 수 있다면 조금 시간이 걸리더라도 어쩌면 우리에겐 전화위복의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와중에 미국이 보인 행태는 반드시 짚고 가야 한다. 한일 무역 갈등이 정점으로 달리고 있을 때 미국의 존 볼턴 국가안보보좌관이 일본을 거쳐 방한해서 방위비 분담금 얘기를 하고 갔다. 지금보다 6배나 더 많은 50억 달러를 요구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상식 밖이며 모욕적이다. 그 후에는 미국이 중거리 미사일을 한국이나 일본에 배치할 수 있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한마디로 오만하고 거만한 행보다. 또 그 직후에는 북한과 조만간 북미 실무회담을 제안하겠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북미대화를 지렛대로 삼아, 그것이 약하면 중거리 미사일 문제로 여론을 타격한 뒤 결국 돈을 더 많이 받아 내려는 속셈으로 읽힐 뿐이다.

최근 일본의 무역보복 뒤에는 미국이 있는 것이 아닌지 하루에도 몇 번씩 씹고 또 곱씹어 생각해 본다. 마침 지난 5일 일본 NHK가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일본의 한국에 대한 무역보복에 관한 고노 다로 일본 외무상의 설명을 듣고 일본 입장에 이해를 나타냈다고 보도했다. 물론 NHK 보도 인지라 그대로 믿기는 어렵지만 영 찜찜한 마음은 가시질 않는다. 마치 114년 전 카쓰라-태프트 밀약의 그 유령이 지금까지 살아남아 다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은 아닌지 자다가도 눈이 번쩍 뜨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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