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딱 109년 전 오늘이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庚戌國恥). 우리는 역사상 처음으로 나라를 빼앗기는 치욕을 겪었다. 말 그대로 천붕지통(天崩之痛)의 눈물이 산하를 뒤덮었다. 누구는 세상이 싫어 산으로 들어갔고 또 누구는 국경을 넘어 이국땅에서 독립의 희망을 일궜다. 그도 저도 참을 수 없었던 양심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했다. 하기야 이 땅에서 살아도 차마 죽지 못해 살았던 백성들의 피눈물은 또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나라를 망친 왕족을 비롯해 당시의 지배세력은 어떤 선택을 했을까. 그들 대부분은 오히려 나라를 짓밟은 일제의 편에 섰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일제로부터 한일합병의 공로로 작위를 받은 사람들은 누구인가. 역시 왕족을 비롯해 고관대작들이 대부분이다. 다시 말해 나라를 빼앗기고 조선의 백성들은 일제의 식민이 되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조선 왕족을 비롯한 지배세력의 기득권은 사실상 유지된 셈이다. 이런 점에서 조선 왕실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반면에 총칼을 들고 일제에 맞섰던 사람들은 대부분 ‘민초’였다. 왕족이나 고관대작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들 민초들이 이번에는 ‘의병’이 됐다. 참으로 자랑스런 우리 역사의 유산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반제국주의 식민지 독립운동사에서 한국만큼 그렇게 오랫동안 나라 안팎에서 치열하고 용맹스럽게 총칼을 들었던 역사가 또 있을까 싶다. 과잉 찬양이 아니다. 그동안 우리가 몰랐던 독립투쟁사의 내면을 알면 알수록 위대한 선열들의 숨결은 우리의 옷깃을 여미게 할 정도이다.

한일합병 109년,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109년 전의 치욕까지 망각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오늘은 109년 전의 모습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강대해졌다. 비록 나라가 분단돼 있고 여전히 강대국들 틈에서 좌고우면 할 일들이 많긴 하지만 세계 10위권의 경제강국을 일궈낸 대한민국이다. 게다가 민주주의적 발전은 아시아에서 한국을 따라잡을 나라가 없을 정도이다. 무능했던 조선은 그처럼 초라한 모습으로 망했지만, 지금의 대한민국은 자랑스런 역사의 길에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한일합병 109년, 그리고 ‘대한민국 100년’을 맞은 2019년의 대한민국은 많이 혼란스럽다. 거침없이 그리고 참으로 열심히 달려왔던 대한민국 100년의 역사지만 국민의 눈높이에는 여전히 만족스럽지 않다. 경제는 부국이 됐다지만 국민의 삶은 힘겹다. 새롭게 형성된 ‘계급적 지배구조’는 조선시대의 ‘반상(班常)’을 연상케 할 정도이다. 민주주의 발전도 기적을 일궜다지만 정치의 질적 수준은 부끄러울 정도이다. 게다가 일부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노라면 침을 뱉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정치인이 아니라 ‘정상배(政商輩)’와 다르지 않은 무리들이 많아도 너무 많다. 마침 일본 아베 정권이 무역보복을 단행했다. 사실상 경제침공에 다름 아닌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겉으로는 1965년의 한일협정을 들이대며 ‘국가 간의 신뢰’를 어겼다는 등의 궤변을 늘어놓고 있지만 속내는 이번 기회에 한국을 다시 일본의 영향력 아래 두겠다는 발상에 다름 아니다. 한․간의 긴장을 최고 수위로 끌어 올리면서 동시에 한국 경제를 난타하는 방식이라면 아베 정권의 입맛에 딱 맞다고 판단할 것이다. 아베 정권에 대한 일본 내의 여론도 나쁘지 않다고 한다. 게다가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든든한 지원까지 더해지고 있으니 아베 입장에서는 ‘신의 한 수’가 됐다는 평가도 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의 경제침공이 과연 아베 정권의 완승으로 끝날 것인지는 불투명하다. 마치 100여년 전에도 그랬듯이 일본의 경제침공에 맞서는 대한민국의 의병들이 전국 각지에서 들불처럼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의 대한민국은 100여년 전의 조선이 아니다. 아베 정권의 무도한 경제침공을 준엄하게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한국 정부의 단호한 자세는 그 자체가 국민의 목소리다. 아베 정권이 두려워해야 할 조선의 ‘의병 정신’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정부의 의지까지 함께 실려 있으니 과연 이번 싸움이 일본 아베 정권의 일방적 승리로 끝날 지는 두고 볼 일이다. 그럼에도 참으로 아쉬운 대목만큼은 짚고 가지 않을 수 없다. 바로 미국 트럼프 행정부다. 평화헌법을 개정하려는 아베 정권의 버팀목이 돼 주더니 이번에는 노골적으로 아베의 편에 섰다. 트럼프 행정부는 한․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을 파기한 한국 정부를 향해 전방위적으로 압박을 하고 있다. 심지어 우리 군 당국이 독도 주변의 동해에서 방어훈련을 한 것까지 트집을 잡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미국’이라는 나라가 우리에게 무엇인지 다시 깊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100여년 전에 일본의 한국 식민지 지배를 그것도 비밀리에 처음으로 인정한 나라가 바로 미국이다. 미국은 우리 역사에서 그런 나라였다.

아쉬운 대목이 하나 더 있다. 미국의 비호 아래 날뛰고 있는 일본 아베 정권에 맞서 대한민국 국민과 정부는 절박한 심정으로 국민적 힘을 결집하고 있다. 질 수 없는 싸움이요, 또 져서도 안 되는 싸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와중에 우리 국민과 정부의 태도를 조롱하며 폄훼하는 무리들이 사회 곳곳에 이렇게도 많이 포진돼 있는지 정말 깜짝 놀랐다. 마치 나라를 팔아먹은 친일 매국노들이 부활한 듯, 독립투사들의 숨통을 끊었던 밀정들이 다시 대거 길거리로 나선 듯 ‘토착 왜구들’이 어쩌면 이렇게도 많은지 놀라고 또 놀랄 따름이다. 과거 친일청산을 못한 원죄 치고는 너무도 아픈 대목이다. 경술국치 109년을 맞은 오늘, 우리들 앞에는 아직도 토착 왜구들이 곳곳에서 준동하고 있음을 목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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