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상병 정치평론가

유럽 정당정치의 역사는 그 자체가 산업혁명과 자본주의 발전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정치적 경쟁이 기존의 지배세력과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대립하면서 정당정치도 본격화 될 수 있었다. 그 연장선에서 부르주아 정당이 탄생하고 노동자 계급 정당이 출현할 수 있었다. 계급의 분화 형태와 선거제도 등에 따라 각 나라의 특성에 맞게 정당체제가 형성되긴 했지만 대체로 보수와 진보의 대결로 압축될 수 있었던 배경이었다.

그로부터 거의 200년이 지났다. 영국 노동당으로부터 셈을 해도 벌써 110년이 넘었다. 최근의 유럽정치 흐름을 보면 이전처럼 보수와 진보의 프레임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여기에 기존의 기득권 정당들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이슈를 선점하는 신생 정당들이 급부상하는 현상으로 압축된다. 그 결과 기존의 거대 기득권 정당들이 몰락하거나 쇠퇴하고 새로운 정당들이 유럽 곳곳에서 급부상하는 모습이다. 유럽의 정치지형이 크게 바뀌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정치도 크게 다르지 않다. 20세기 냉전체제의 마지막 유산으로 남아있는 한국의 정치지형도 보수와 진보의 싸움으로 덩달아 달아올랐다. 보수와 진보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없이 분단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반공주의’가 정치지형을 갈랐다. 그 후에는 경상도․전라도 싸움이 기존의 정치지형에 덧칠을 해버렸다. 그렇다 보니 보수와 진보의 대결구도는 어느새 기득권을 쥔 정치꾼들의 사냥터가 돼버렸다.

이제 한국정치도 조금씩 변하고 있다. 기존의 ‘이념대결’로 정치권력을 나눠 갖던 거대 기득권 양당체제에 대한 국민의 반감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20대 총선에서의 국민의당 돌풍이 마냥 우연만은 아닌 것이다. 게다가 최근의 주요 이슈들도 적대적 이념대결로 몰고 가기엔 간단치가 않다. 이를테면 비정규직, 미세먼지, 4대강, 미국의 50억달러 방위비 분담금, 일본의 경제보복, WTO 등 무엇이 진보이며 무엇이 보수란 말인가. 기존의 개념과 일치하지 않는 새로운 싸움들이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우왕좌왕 하는 민주당, 일단 반대부터 하고보는 자유한국당의 현실은 우연이 아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정치지형도 크게 바뀔 수밖에 없다. 기존의 거대 양당체제로는 그 어떤 생산적인 담론이나 해법을 찾기 어렵기 때문이다. 날만 새면 싸움질에 시간만 허비하는 국회의 현실은 이미 거대 양당체제가 해체될 임계점에 이르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시점에서 ‘제3지대 정당’에 대한 논의가 다시 가시화되고 있다. 이번에는 민주평화당 내 반당권파인 ‘변화와 희망의 대안정치연대’가 앞장서고 있다. 이들은 발표문을 통해 “기득권 양당체제를 극복하고 한국정치를 재구성하기 위해 새로운 대안을 모색한다”고 밝혔다. 바른미래당과의 통합을 통해 민주당과 자유한국당 양당체제에 대항하는 새로운 정당, 즉 ‘제3지대 정당’을 창당하겠다는 의지로 보인다. 방향은 옳다. 그러나 방향이 옳다고 해서 목적지까지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정치에서의 제3지대 정당론은 이미 상처투성이가 돼 버렸다. 돌풍을 일으켰던 국민의당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 정당에 몸담았던 정치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국민의 불신과 냉소는 이미 바닥까지 갔다. 원칙도 명분도 상식도 신의도 없이 서로를 비방하던 그들이 이제 총선이 다가오자 다시 살기 위해 ‘제3지대 정당’ 운운하는 목소리에는 정상배들의 체취가 물씬 묻어난다. 그런 태도로는 열 번을 외쳐도 동의를 구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지금 이 시점에서 제3지대 정당은 절박하고 불가피하다. 그래야 해방 이후 지금껏 누려온 기득권 정치세력의 물갈이가 제대로 이뤄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민주당을 보라. 이렇게 무능하고 답답한 집권세력도 흔치 않을 것이다. 또 자유한국당은 어떤가. 이런 정당이 왜 존재해야 하는지를 모를 정도이다. 궤변과 태클도 유분수다. 거의 코미디 수준이다. 합리적인 다수의 국민은 마음을 줄 곳이 없다. 양당 독점체제의 임계점에서 불을 지르고 싶지만 대안이 없다.

따라서 제3지대 정당의 공간은 여전히 넓지만 깃발이 없다. 아니 깃발의 주인공도, 세력도, 깃발의 명분이나 비전도 보이지 않는다. 제3지대 정당이 성공하려면 먼저 국민적 동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이도저도 당선이 희박한 정치꾼들이 그들의 당선을 위한 이합집산이라면 오히려 국민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제대로 하겠다면 그들에게 남아있는 작은 기득권부터 던져야 한다. 그래야 최소한의 국민적 동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으로는 연대할 수 있어야 한다. 거대 양당체제와 그 본질인 계파정치를 끝장내겠다는 의지가 있는 정치권 안팎의 인사들과 함께 가야 한다. 기득권을 내려놓으면 길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가치와 비전을 내놓아야 한다. 왜 제3지대 정당이어야 하는지 국민에게 설명하고 공감토록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제3지대 정당을 상징하는 대선주자급 인물들을 내세울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제3지대의 깃발이 더 선명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아직도 시간이 있고 희망도 있다. 여론도 살아있고 정치공간도 넓게 형성돼 있다. 어쩌면 참으로 좋은 기회이다. 그렇다면 지금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얻을 것인지, 주체의 의지와 결단 그리고 한국정치의 미래를 고뇌하는 진정성과 절박함이 더 필요한 시점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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