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장기알은 차(車), 포(包), 상(象), 마(馬) 등 각각 2개의 장군들과 5개의 졸(卒) 또는 병(兵)이 있으며, 중군의 원수인 초(楚)와 한(漢)을 측근에서 보위하는 2개의 사(士)가 있다. 장기는 항우의 초와 유방의 한이 천하를 두고 싸운 것을 발전시킨 흥미진진한 게임이다. 쌍방은 궁(宮)에 있는 원수(元帥)를 잡기 위해 지력을 총동원해 게임을 펼친다. 그 가운데 차는 공격과 수비를 겸하는 대장으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일단 위기가 발생해 원수가 죽게 될 경우에는 원수를 살리기 위해 가장 아끼는 차를 희생시키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이 곧 ‘사차보수’ 즉, 차를 버리고 원수를 보호하는 전술이다. 장기판에서처럼, 정치판에서도 가장 아끼는 부하를 희생해 최고지도자를 구하기도 한다.

당제국은 ‘대당(大唐)’이라고 부른다. 중국의 왕조 가운데 최고의 번영을 자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당도 ‘안사의 난’ 이후로 원기가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중당에 이르면 환관이 정치의 전면으로 등장해 외조의 신하들과 치열한 권력 다툼을 펼쳤다. 만당에 이르자 중앙정부는 이미 통치력을 상실했다. 반란진압 과정에서 실력을 기른 지방의 절도사들은 군사력을 바탕으로 사실상 독립왕국으로 변했다. 번진과 중앙정부, 번진과 번진 사이에 권력투쟁이 본격화됐다. 888년, 멍청이 황제 희종이 병사하자, 환관 양복공(楊復恭)이 이현의 동생 이걸(李傑)을 황제로 옹립했다. 그가 소종(昭宗)이다. 소종은 자존심이 강했다.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인재를 구했지만, 누구도 기우는 왕조의 충신이 되려고 하지 않았다. 소종은 자신을 옹립한 환관 양복공의 전횡을 견제하기 위해 연로하다는 이유로 은퇴를 강요했다. 양복공은 조카 양수량(楊守亮)에게 도망쳐 반란을 일으켰다. 이무정(李茂貞)과 왕행유(王行瑜)가 반란을 진압했다. 실력자로 부상한 이무정은 공개적으로 소종을 모욕했다. 참기 어려웠던 소종이 재상 두양능(杜讓能)에게 이무정을 토벌하라고 명했다. 두양능은 냉정하고 현실적인 안목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는 중앙정부의 힘으로 이무정 토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젊은 황제는 자기가 출전하겠다고 우겼다.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두양능은 황제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소종이 두양능을 시켜 병력을 모은다는 사실을 안 이무정은 왕행유와 연합하고 중앙군을 기다렸다. 소종이 파견한 중앙군은 한 번의 전투로 무너졌다. 장안까지 진격한 이무정은 두양능을 죽이라고 압박했다. 대전에서 허둥지둥하는 소종에게 두양능은 모든 책임을 자기에게 미루라고 건의했다. 결국 두양능은 뇌물을 받았다는 죄명으로 사사됐다.

그러나 이무정의 요구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는 계속 소종을 압박해 자기의 관할지역을 확장하고, 중서령이라는 고관으로 임명되자 본거지로 돌아갔다. 소종은 두양능이라는 충신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망국의 속도를 가속화했다. 나중에 이무정이 다시 몇 차례 더 장안성을 공격하자 그는 이극용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종을 한마디로 폄하할 수 없는 것은 그의 끈질긴 노력 때문이다. 이후에도 소종은 군대를 모아 이무정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반격을 받고 화주(華州)로 도망쳐 한건(韓建)에게 의지했다. 한건은 이무정과 한패였다. 그는 소종의 아우 11명을 죽이고 군대를 해산했다. 나중에 이극용(李克用)과 주전충(朱全忠)이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려고 하자, 소종을 장안으로 돌려보냈다. 돌아온 소종은 주전충의 앞잡이였던 재상 최윤(崔胤)과 함께 주요 환관들을 제거했다. 그러나 남은 환관들이 소종을 납치해 이무정을 찾아갔다. 결단을 내릴 때가 됐다고 판단한 주전충은 이무정을 포위했다. 다급해진 이무정은 환관 72명을 살해하고 소종을 주전충에게 넘겼다. 좌충우돌하던 소종은 결국 주전충의 손에 놀아나다가 904년에 주전충의 하수인에게 피살됐다. 장기판의 최종승자는 곁에서 구경하던 주전충이었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