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형설지공(螢雪之功)
[고전 속 정치이야기] 형설지공(螢雪之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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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어느새 입춘이 지났다. 올겨울은 대설이 내리지 않아 설경을 보는 즐거움이 별로 없었다. 겨우내 되도록 외출을 삼가고 독서를 즐기다가 문득 ‘형설지공’이라는 말이 생각났다. 여름밤에는 반딧불, 겨울밤에는 눈을 조명으로 삼아 공부했다는 의미로 어려움을 극복하고 학문적 성취를 이룬 사람을 가리킨다. 이 고사성어의 주인공은 동진의 차윤(車胤, 333~401)이다. 차윤은 지금의 호북성 공안인 남평 출신으로 자가 무자(武子)이다. 어려서 집안이 가난했지만 총명하고 호학했던 그는 등불을 켤 기름을 사지 못하자, 반딧불을 잡아 하얀 주머니에 넣고 밤이 되면 그것을 조명으로 사용해 학식을 쌓았다. 사람들은 그가 사용한 반딧불 조명을 여낭형(如囊螢), 즉 반딧불 주머니라고 불렀다. 기록에는 눈을 조명으로 삼았다는 말은 없는데, 누군가의 상상력이 차윤의 겨울공부까지 감안해 형설이라는 말을 만들었을 것이다. 중국에서는 형설지공이라는 말보다 낭형영설(囊螢映雪)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차윤은 학식도 뛰어났지만, 용모도 유난히 아름다웠다. 당시 실력자였던 형주자사 환온(桓溫)은 한눈에 그에게 반해 자신의 종사로 삼았다. 차윤은 특히 집회를 잘 운영했다. 환온이 주도하는 집회는 항상 성황을 이루었다. 사람들은 차윤이 빠진 집회는 재미가 없다고 말했다.

차윤은 비교적 순조롭게 출세해 재상이 됐다. 공정하여 권세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그는 간신 왕국보(王國寶)가 대신들의 연명으로 황제의 아우로 보정을 담당하던 회계왕 사마도자(司馬道子)에게 특별한 대우를 해야 한다는 주청을 올리자고 재인하자 정면에서 반박하며 서명하지 않았다. 또 함부로 법을 어기는 회계왕의 세자 사마원현을 공격했다. 사마원현은 그에게 자살하라고 강요했다. 차윤은 죽어서라도 간악한 자를 드러내게 됐으니 다행이라는 말을 남기고 당당하게 자살했다.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매우 슬퍼했다.

당시의 명사였던 사안(謝安)과 사석(謝石) 형제는 집안에서 사람들과 학습하고 토론했다. 차윤도 참석했는데 모르는 것이 있어도 감히 사씨 형제에게 묻지 못했다. 나중에 원양(遠洋)에게 말했다. “많이 물으면 사씨 형제가 귀찮아하지 않을까?” “자네가 묻는다고 싫어할 것 같지는 않네.” “어떻게 아는가?” “거울은 언제나 사람들을 비추는 것을 꺼리지 않는다네. 깨끗하게 흐르는 물은 바람이 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지!” 거울은 비추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다는 명경불피(明鏡不疲)의 유래이다.

차윤이 나고 자란 호남성 공안에는 그에 관한 유적이 많다. 차공산(車公山), 차공정(車公井), 차공교(車公橋), 낭형대(囊螢臺)와 그의 옛 집터, 묘지가 있으며, 차계(車溪), 차저촌(車渚村)이라는 지명도 있다. 낭형대는 차윤이 반딧불로 공부하던 곳이라고 한다. 송의 왕제(王齊)는 이곳을 지나며 시 한 수를 지었다.

유생골후명유재(儒生骨朽名猶在), 고총상망이란진(高冢相望已亂眞).
지인야심형취처(只認夜深螢聚處), 편응가하독서인(便應家下讀書人).
유생의 뼈는 썩었어도 이름은 아직 남았는데,
옛 무덤이 늘어서서 어느 것인지 모르겠구나.
밤이 깊어 반딧불이 모이면,
거기가 독서하던 사람의 집이겠지,

낭형대에는 차저서원(車渚書院)과 연광서원(延光書院)이 있다. 그 가운데 연광서원기를 지은 청의 공지명(龔之茗)은 서원의 이름에 대해 반딧불의 빛이 지금까지 이어진다는 뜻이라고 했다. 전례대로 대통령의 3년차가 되자 각종 사건이 난무한다. 정치공세로 변해가는 것을 보면서 어렵게 공부해 출세한 후 당당하게 마지막을 장식한 차윤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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