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 속 정치이야기] 토혈이사(吐血而死)
[고전 속 정치이야기] 토혈이사(吐血而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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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중국사에서 환관은 외척과 함께 정치를 어지럽히는 양대세력으로 비난을 받아왔다. 당연히 사대부들의 입장이다. 환관은 황제의 노예이다. 지존의 측근에 있으니 권력에 개입할 여지도 많지만, 걸핏하면 국정농단의 원인으로 몰려 도살되기도 했다. 그러나 환관의 역사적 작용도 분명히 긍정과 부정, 양면을 객관적으로 평가해야 한다. 현종 이융기를 모신 유명한 환관 고력사(高力士, 684~762)의 본명은 풍원일(馮元一)이다. 광동성 고주 출신인 그는 영남의 유민이 일으킨 반란에 연루돼 9세에 거세됐다. 궁으로 들어간 그는 처음에 무측천을 모셨다가 사소한 잘못을 저질러 쫓겨났다. 환관 고연복이 양자로 삼고 이름을 고력사로 바꾸었다. 양부 고연복이 권력자 무삼사와 왕래한 덕분에 다시 입궁해 무측천을 모셨다. 고력사는 당당한 외관과 치밀한 성품으로 신임을 얻어 조령전달을 담당했다.

권력의 이동에 예민했던 그는 진작부터 이융기를 진심으로 받들었다. 당륭정변으로 권력을 장악한 이융기가 그를 측근에 두었다. 이융기가 정적들을 차례로 제거하고 즉위하기까지 고력사의 조력도 컸다. 현종은 무측천 시기에 급성장한 신진사대부와 몇 차례의 정변에서 공을 세운 공신과 무장들을 견제하기 위해 환관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환관은 군사, 외교, 교육, 문화 등 여러 방면에서 현종의 촉수가 됐다. 현종은 그 정도로 정치적 기강이 무너진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른 환관들과 달리 신중했던 고력사는 거의 궁중을 나가지 않았다. 그는 조정관료나 절도사들과 두터운 친분을 유지하며, 환관의 권력남용을 적절히 견제하는 뛰어난 정치적 감각을 보여주었다. 중요한 조정의 결정은 거의 반대하지 않았다. 현종이 조정의 결정에 불만을 품으면 오히려 설득했다. 다방면에서 인재를 발굴해 추천하기도 했다. 고구려 유민 고선지를 발탁한 것도 그였다. 개원지치는 정치적 균형이 바탕이었고, 그 배후에는 고력사의 활약도 있었다.

현종은 말년에 정치에 염증을 느끼고 양귀비와 환락에 빠졌다. 고력사와 멋진 파트너였던 요숭, 송경과 같은 뛰어난 재상도 세상을 떠났다. 고력사는 환관이라는 신분적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현종은 고력사보다 원사예(袁思藝)라는 환관을 총애하기 시작했다. 조심스러웠던 고력사는 모두 좋아했지만, 거만했던 원사예는 모두 꺼렸다.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자 고력사는 끝까지 현종을 따라 촉으로 갔지만, 원상예는 안록산에게 투항했다. 성난 군중이 양귀비를 죽이라고 하자 주저하는 현종을 설득하고 양귀비를 목졸라 죽인 악역도 고력사가 맡았다. 태상황으로 물러난 현종이 장안으로 돌아왔을 때도 여전히 고력사가 곁을 지켰다. 새로운 권력자 이보국은 태상황의 정치적 재기를 걱정했다. 그는 고력사의 능력이 두려웠다. 고력사는 이보국의 모함에 걸려 검남도로 유배됐다. 도중에 수많은 냉이가 보였지만, 사람이 먹지 않는 것을 보고 시 한 수를 지었다. 

양경작근매(兩京作斤賣), 오계무인채(五溪無人采), 
이하수부동(夷夏雖不同), 기미종불개(氣味終不改).
서울에서는 근으로 달아서 파는데
오계에서는 아무도 캐지 않는다.
오랑캐와 중국인은 다르지만,
맛은 결국 바뀌지 않을 것이다.

나중에 사면을 받아 돌아오다가 이미 이융기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력사는 북쪽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피를 토하며 죽었다. 대종은 그를 현종의 태릉에 배장했다. 고력사에게 소중했던 것은 권력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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