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두회정(竇懷貞, ?~713)은 성당시기 재상을 역임했다. 조부와 부친이 태수와 좌상을 역임한 명문가의 후손이었지만 권력만을 추구하는 자의 시작과 끝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준 전형적인 인물이었다. 출발은 제법 그럴 듯했다. 초임 시절에는 검소한 의복을 입고, 오락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고관이 돼서도 탁월한 행정적 업적과 청렴으로 칭송을 받았다. 그러나 어사대부로 임명돼 중앙정부로 들어오면서 그의 줄타기가 시작됐다. 중종시기에 위황후가 조정정치에 간여했다. 위황후의 부친은 위현정(韋玄貞)이었다. 두회정은 위현정과 이름의 마지막 글자가 같은 것에 착안했다. 황제의 이름과 같은 글자를 사용하는 것을 피하는 것을 피휘(避諱)라고 한다. 두현정은 위황후에게 줄을 대기 위해 재빨리 이름을 종일(從一)로 고쳤다. 오로지 한결같은 마음으로 섬기겠다는 뜻이었다. 환관의 세력이 커지자, 일부러 수염을 기르지 않고 환관처럼 행세하기도 했다. 

두회정은 부인이 일찍 죽었다. 중종이 밤중에 잔치를 열고 두회정을 초대해 새로 부인을 얻어주겠다고 말했다. 두회정은 연신 감사했다. 얼마 후, 내시가 촛대, 비단장막, 부채 등을 들고 복도에서 나왔다. 부채의 뒤에 신부가 따라왔다. 중종이 그녀를 두회정과 마주앉게 하고 두회정에게는 각선시(却扇詩)를 지으라고 명했다. 궁선이 걷히자 신부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녀는 황후의 유모 왕씨였다. 게다가 왕씨는 이민족 출신이었다. 두회정은 몇 번이고 중종에게 절을 하며 감사했다. 중종은 크게 웃고 왕씨를 거국부인으로 봉했다. 유모의 남편을 아혁이라고 불렀는데, 두회정은 나중에 자신의 낙관을 ‘황후아혁’이라고 새겼다. 황후 유모의 남편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웠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를 국혁이라고 놀렸지만, 두회정은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경운원년(710), 이융기(李隆基)가 정변을 일으켜 위황후를 죽였다. 두회정은 재빨리 아내를 죽이고 수급을 바치며 사죄했다. 얼마 후 예종 이단(李旦)이 계위했다. 두회정은 호주사마로 좌천되자 원래 이름으로 되돌렸다. 예종은 누이 태평공주가 조정에 간여하는 것을 방치했다. 두회정은 조정에서 퇴근할 때마다 그녀에게 문안했다. 예종의 딸 금선공주와 옥진공주는 도교에 빠져 아예 여도사가 됐다. 예종은 두 공주에게 도관을 지어주고 싶었다. 모두 반대했지만 두회정만은 적극 찬성했다. 게다가 직접 건축공사를 감독했다. 아우가 재상이 되어 천자를 보좌하지는 않고 종일 이런 일만 하느냐고 나무랐지만 꿈쩍도 하지 않고 열심히 건축 감독노릇에 전념했다. 예종은 그러한 두회정이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관상가가 두회정에게 곧 재난이 닥칠 것이라고 말했다. 겁을 먹은 두회정은 사직하고 안국사로 들어가 노예가 되겠다고 요청했다. 예종은 웃으면서 오히려 승진시켰다. 예종이 태자 이융기에게 선위했다. 현종은 두회정을 상서좌복야, 위(魏)국공으로 높여주었다. 현종 초기에는 태평공주가 권력을 휘둘렀다. 7명의 재상 가운데 5명이 그녀의 문하에서 나왔다. 두회정도 거기에 포함됐다. 그러나 그의 줄서기는 더 이상 성공하지 못했다. 무측천을 닮고 싶었던 태평공주가 현종을 폐위하려고 모의했다. 그러나 사전에 계획이 누설됐다. 현종이 재빨리 진압했다. 두회정은 도랑 속에 숨었다가 목을 매어 자살했다. 현종은 죽은 두회정의 수급을 참수하고 성을 독(毒)으로 바꾸었다. 권력의 중심으로 다가가는 것이 쉽지는 않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다가간 후의 처신이다. 처음에는 청렴하고 유능했던 두회정은 중앙정부로 들어오자 초심을 잃고 말았다. 권력이 자신의 인격보다 더 중요하게 보이는 순간 부끄러움도 사라진다. 부끄러움이야말로 인간의 근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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