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상욱 역사 칼럼니스트 

 

성당시기 재상을 역임한 최현휘(崔玄暉)는 하북성 안평 출신으로 원명은 필(畢), 자는 행(行)이다. 박릉최씨로 무측천 시대의 명재상 적인걸에게 발탁돼 요직을 거친 후 재상이 됐다. 숙부인 비서감 최행공은 어려서부터 공부에 매진하는 그를 보고 훗날 큰 인물이 될 것이라고 칭찬했다. 용삭2년(662), 명경과에 합격해 40년 후인 장안원년(701)에 천관시랑으로 승진했다. 아들이 관리가 되자 그의 모친 노씨가 훈계했다.

“제부 신현이 이런 말을 하더구나, ‘아들이 관리가 되자 사람들이 이제 가난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재물은 풍족하지만 걱정은 오히려 더 많아졌다.’ 옳은 말이다. 요즈음 친척 가운데 관리가 되어 돈으로 부모를 잘 모시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부모는 그 돈이 어디서 났는지 묻지 않더구나. 자기의 봉록이라면 분명히 좋은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돈은 도적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 이제 너도 관리가 됐으니 명심해야 한다, 충직하고 청렴하지 않으면 천지간에 발 하나 디딜 곳이 없을 것이다.”

최현휘는 청렴한 관리로 유명했다. 그러나 성정이 올곧고 사사로운 청탁을 거절하자, 세력가들이 그냥두지 않았다. 최현휘는 결국 지방관으로 좌천됐다. 얼마 후 무측천이 최현휘를 중앙관으로 복직시키면서 말했다.

“그대를 좌천시키자, 많은 사람들이 좋아했다. 그 꼴을 더 두고 볼 수 없어서 다시 불렀다. 지금부터 소신껏 행동해도 좋다.”

무측천은 오랜 중국사에서 유일무이한 여자황제였다. 황제가 되기까지 수많은 난관을 갖가지 방법으로 돌파했다. 역사가들로부터 온갖 비난을 받았지만, 냉정하게 보면 성당시대를 연 것은 그녀 덕분이었다. 무측천은 내준신, 주흥 등 혹리들을 시켜 정치적 장애물을 잔혹하게 제거했다. 그러나 정권이 안정되자 완장을 찬 혹리들의 월권을 좌시할 수 없었다. 재상 최현휘가 그들을 탄핵하자, 기다린 것처럼 재빨리 처형했다. 만년에 그녀는 장역지와 장창종 형제를 침실로 끌어들였다. 송경과 최현위가 형제를 탄핵했지만 끝까지 감쌌다. 무삼사를 비롯한 친정조카들도 그녀를 믿고 함부로 만행을 저질렀다.

만년에 무측천은 중병에 걸려 구중궁궐에 숨었다. 장역지 형제만 간호했다. 최현휘는 태자가 간호를 맡아야 한다고 진언했다. 무측천은 고맙다고 했지만, 의견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룡원년(705), 최현휘, 장간지, 환언범, 경휘, 원서기 등이 병변을 일으켜 태자 이현을 옹립했다. 신룡정변으로 등극한 황제가 중종이다. 무측천이 주동자인 최현휘를 원망했다.

“너는 내가 직접 선발했다. 네가 어떻게 이럴 수 있느냐?”

최현휘는 바로 이것이 폐하에 대한 보답이라고 말했다. 최현휘다운 당당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최현휘 덕분에 제위에 오른 중종은 옹졸하게 보답했다. 도교를 맹신한 중종은 술사 정보사를 비서감으로 임명하려다가 최현휘의 반대에 부딪쳤다. 기회를 노리던 무삼사가 중종과 최현휘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결국 최현휘는 지방관으로 좌천됐다가 유배형까지 받았다. 유배지로 가던 도중에 병사했지만, 69세였으니 수명은 다한 셈이다. 훗날 황제들은 그의 공을 기려 왕으로 봉했다. 한마디로 은혜와 보답을 단언할 수 없는 곳이 정치무대이다. 그래도 기준은 공사의 구분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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