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우리말에 ‘고약하다’는 말이 있다. 얼굴 생김새가 흉하고 험상궂거나 맛, 냄새 따위가 비위에 거슬리게 나쁘다는 뜻으로 쓰인다. 그런데 이 말이 생겨난 데에는 재미난 일화가 전한다. 

세종 때 고약해(高若海)라는 신하가 있었다. 문신으로 성균시에 합격했으며 특별한 효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고약해가 세종에게는 인상 좋지 않은 신하로 각인됐다. 그는 세종이 궐내에 내불당을 지으려 하자 아주 무례한 안색과 어조로 직언을 쏟아냈다. 

인자한 세종도 참는 데 한계가 있었다. 결국 “저 무례한 자를 탄핵하도록 하라”고 사헌부에 특명을 내렸다. 그런데 사간원들이 나서서 가로막았다. “고약해를 죄로 다스린다면 어느 누가 감히 전하에게 바른 말을 하겠습니까. 일찍이 충직(忠直)하다고 칭찬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좀 무례했더라도 죄를 묻지 마시고 언로를 넓히시옵소서.” 

세종이 벌떡 일어났다. “경의 말은 옳지만 직언을 미워한 게 아니라 그 무례함을 미워한 것이다”라고 처벌을 다시 명했다. 이때부터 비위에 거슬린다는 대명사로 ‘고약하다’는 유행어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나라를 다스리는 이들에게는 고약한 말이 약이 된다. 아첨이나 하고 비위나 맞추는 말만을 듣기를 원한다면 그것이 곧 병이 되는 것이다.’ 선현의 말씀을 모은 채근담의 가르침이 아닌가.

연산군 때 영의정 한치형(韓致亨) 등 중신들이 연산군에게 이른바 시폐(時弊) 10조목을 올렸다. 이들은 연산의 일탈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어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한 것이다. 연산군 일기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전하께서 후원에서 내시들과 함께 장난이나 치고, 사사로운 잔치나 벌이고 있으니 이게 옳은 일입니까? 백성을 물이고, 임금은 배라고 합니다. 물은 배를 띄울 수 있지만, 배를 뒤엎을 수도 있다(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 水則覆舟)라고 했습니다.…(하략)” 

‘임금도 바꿀 수 있다’는 순자(荀子)의 글을 인용한 공갈성 극간이었다. 연산은 의외의 답을 한다. ‘경들의 말이 옳다’고 고개를 끄덕였다고 한다.

효종 때 이경여(李敬輿)는 영의정이었다. 즉위한 지 얼마 안 된 임금에게 올린 상소문은 왕의 권위마저 무너뜨리는 글이었다. ‘나라가 위란에 빠진 것은 임금이 초심을 잃고 사심을 이기지 못한 것이 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이경여는 자신이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고 했다. 

그런데 효종은 비답(批答; 상소에 대한 임금의 답서)이 특별했다. “경이 왜 물러나려고 합니까. 모든 것은 전적으로 임금인 나의 불찰이오. 나와 같이 일할 만한 자격이 없다고 하여 날 버리지 마시오. 날마다 숨김없이 직언을 올리시오. 그래서 나로 하여금 선(善)한 정치를 하게 하고 허물을 고칠 수 있게 하시오.”

허물을 지적한 것을 받아들이고 과오를 인정한 효종의 아량이 이랬다. 왕조사회에서도 대부분 왕들은 자신을 혹독하게 비판을 해도 그것을 보약으로 삼았다. 잘못을 지적한다고 벌을 줄 수도 없었다.  

최근 언론보도에 청와대와 정당들이 언론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사례가 빈번해지고 있다. 야당의 한 국회의원은 언론사 간부의 파면을 촉구하기도 했다. 언론사가 오보나 허위기사에 대한 책임은 당연히 져야 하지만 청와대 대변인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경찰이 언론사를 압수 수색하려고 시도한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언론 자유는 대한민국이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가치가 아닌가. 촛불 정부가 일부언론의 비판을 문제 삼아 그 가치를 무너뜨리거나 정당들이 언론인들의 파면을 촉구하는 살벌한 분위가 돼서는 안 된다. ‘고약한 비판’일지라도 수용할 줄 아는 정부가 국민의 신망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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