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지금으로부터 250년 전 실학자 홍대용(洪大容)은 신비한 하늘을 품고 있었다. 그는 꼬장꼬장 성리담론에만 집착했던 선비가 아니었다. 우주에 눈을 돌린 이단아였다. 조선의 학문적 구각을 탈피해 세계로, 우주로 눈을 돌리자고 강변했던 첨단 지식인이었다. 

“우주의 뭇별들은 각각 하나의 세계를 가지고 있고 끝없는 세계가 공계에 흩어져 있는데 오직 지구만이 중심에 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지구 세계를 저 우주에 비교한다면 미세한 먼지만큼도 안 되며 저 중국을 지구 세계와 비교한다면 십 수분의 일밖에 되지 않는다” (의산문답 중에서) 

조선 성리사회는 홍대용을 정신 이상자처럼 대했다. 주자학에 반하는 이론을 주장하거나 글을 쓰면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매도했던 고루하고 경직된 나라였기 때문이다. 

홍대용은 시대적 반항아로 낙인찍혔던 서얼 출신의 실학자들과 비밀리 만나는 수밖에 없었다. 그 친구들이 바로 오늘날 북학파로 평가받고 있는 이덕무를 위시, 박제가, 박지원 등이었다.  

가난했던 조선을 부강시키고 미래에 대비하자는 이들의 주장은 외로운 호소로 그쳤다. 혁신적인 조선의 미래학은 제대로 펼쳐지지 못했던 것이다. 조정 대신들은 자기들의 아류만을 옹호하며 권력을 지탱하기 위한 방법에만 집착했다. 

이 시기 이웃 일본은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으로 일대 서정을 개혁해 유럽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세계로부터 첨단 기술을 수입하고 일본 제품을 수출해 국부를 창출했다. 그러나 조선은 잠에서 깨지 못했다.  

더욱 문을 걸어 잠그고 개화를 외면했다. 19세기 후반 병인양요(丙寅洋擾)와 신미양요(辛未洋擾)를 치른 뒤 대원군은 전국의 요소에 척화비를 세운다. 척화비란 외세를 물리치고 더욱 문을 걸어 잠그겠다는 결의다. 비석 표면에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자는 것이니, 화친을 주장함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라는 글을 새겼다.

그 결과 조선은 어떻게 됐을까. 열국의 각축장이 됐으며 결국 압도적인 무력을 앞세운 일본에 먹히는 비극적 결과를 얻게 된 것이다. 이 시기만이라도 조선이 개화해 세계의 문물을 받아들이고 근대화를 추구했다면 일본의 식민지가 됐을까. 

조선 역사동안 국가를 퇴락시킨 것은 바로 과거지향적 사고 때문이었다. 병자․정묘호란 양 외난을 당한 이후 조야가 똘똘 뭉쳐 국난에 대비함에도 불구하고 주화(主和)니 척화(斥和)니 하며 과거사에 집착해 상대를 공격하는 데 시간을 다 보냈다. 이 반목 논쟁은 조선이 망하는 3백년 후까지 계속됐다. 

지식인들은 파당에 휩싸여 사상의 벽을 더욱 굳건히 다지는 데만 바빴다. 상대의 흠결을 잡고 공격하는 데 주력했다. 이런 와중에 홍대용의 혁신적 천문관이나 실학사상이 수용될 수가 없었다. 권력만 잡으면 되고 좋은 자릴 선점해 개인의 영달만 누리면 됐다. 

지금 대한민국은 어떤가. 지금도 과거사에 매달려 새로운 세계의 대열로 나가는 데 머뭇거림은 없는 것인지. 우리가 국론이 분열돼 미래를 생각할 여유가 없을 때 이미 이웃 중국은 EV(전기자동차), IT, AI 분야에서 한국을 앞지르고 있다. 전문가들은 한국은 현재 제4차 산업혁명 기술에서 중국에 크게 뒤처진 상태이며 5년 뒤에도 따라잡기 힘들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정치가 과거사에만 매몰돼 있으면 미래를 대비할 수 없다. 그럴수록 국론은 분열되고 국가는 동력을 잃는다. 진정한 진보란 과거에 집착만 하는 것이 아니다. 진보정부일수록 미래학의 주인공이 되고 우수한 인재들을 대우하며 세계문명을 개척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다시는 19세기 지난 역사의 과오를 반복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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