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기묘사화(己卯士禍)는 훈구파와 신진 사류사이의 극단적 정쟁의 산물이었다. 기득권의 권력농단을 개혁하려 했던 젊은 지성들을 숙청한 대사건이었다. 

중종은 인자하며 눈물이 많은 왕이었지만 우유부단하여 자신을 왕위에 앉힌 공로 대신들을 내치지 못했다. 원로들의 상소가 거짓임을 알면서도 사류들의 억울한 죽음을 막지 못했다. 

개혁의 선봉이었던 정암(靜庵) 조광조가 왕이 될 것이라고 참소한 증거물은 바로 ‘주초위왕(走肖爲王)’이었다. 나뭇잎에 꿀물을 발라 벌레가 파먹은 것을 역모 증거라고 들이댄 것이다. 왕을 속인 거짓 음모였다. 

숙종 비 인현왕후의 폐비사건도 장희빈 일당의 거짓 참소가 빚은 결과였다. 실록은 ‘장희빈은 온갖 교태와 계략으로 숙종의 판단력을 흐리게 만들었다. 인현왕후를 중전의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중상모략을 일삼았다’고 기록했다. 뒤늦게 참소임을 안 숙종은 치를 떨며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렸다. 

영조 때 노·소론의 권력투쟁에서 소론이 대참화를 입은 사건이 ‘나주 벽서사건’이었다. 벽서란 요즈음의 대자보와 같은 것인데 왕을 비난하고 민중 봉기를 선동하는 내용이었다. 

이 사건의 주모자로 떠오른 사람은 나주에 귀양을 가있던 소론의 윤지(尹志)였다. 그가 객사(客舍)에 글을 써 붙였다는 것이었다.  

“간신들이 조정에 가득하여 백성이 도탄에 빠져있다. 백성이 곤궁한데 가렴주구는 더욱 심하다. 이를 구제하기 위하여 군사를 움직이려고 하니 백성들은 놀라 동요하지 말라.”

전라감사로부터 보고를 받은 영조는 윤지를 압송해 직접 신문하고 관련자들을 모두 사형에 처했다. 서울에 얼마 남지 않은 소론계 인사들은 모두 죽거나 혹은 귀양을 갔다. 평소 소론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있던 영조는 이 사건을 계기로 일대 숙정을 단행한 것이었다. 

나주 벽서사건을 노론계의 음모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이들이 나주에서 사람들을 시켜 거짓으로 벽서를 붙여 문제를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영조는 윤지의 아들을 거열형에 처할 때는 소론 편에 섰던 사도세자를 참관시키기도 했다. 아들에게까지 자신을 거역하는 무리들에 대한 대가가 얼마나 무서운가를 보여주었다. 

권력을 잡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행위는 역사에서 보듯이 결국은 밝혀지기 마련이다. 조광조 등 신진 사류들은 얼마 되지 않아 복권되고 5백년간 ‘기묘명현’으로 숭앙받았다. 이들을 거짓 참소하여 죽음으로 빠뜨렸던 중신들은 간신이란 이름으로 지금도 비판의 대상이 된다. 장희빈의 참소로 쫓겨났던 인현왕후도 생전에 모함이 풀려 환궁했다. 모두 멀지 않은 시간에 진실이 밝혀져 역사가 뒤집어진 것이다.

온통 나라가 드루킹 사건의 회오리에 싸여 있다. 이들의 혐의는 기계를 써 여론을 조작한 행위다. 어떤 변명을 한다고 해도 민주주의에 역행하는 행위이며 진실을 속이는 큰 범죄다. 

경찰수사가 신뢰가 없어지자 야당은 특검을 강격하게 주장하고 있다. 많은 국민들은 포털을 이용한 여론 조작행위가 발붙일 수 없도록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치는 바르게 해야 하는 것이 정도(正道)이다. 그래야만 국민의 신뢰를 얻는다. 만약 사술로 민의를 조작하거나 특정후보를 음해한다면 과거 조선시대 참소 비리와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작은 두 손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것이다. 
한국의 성숙된 민주의식이 손상되는 일이 없도록 여야 정치권은 사명감을 가지고 이 사건을 마무리 지어야 한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