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 로마 외곽에서 열린 가톨릭 평신도 신앙운동 네오까떼꾸메나도의 행사에 자리를 함께 한 프란치스코 교황. (출처: 연합뉴스) 2018.5.5
5일 로마 외곽에서 열린 가톨릭 평신도 신앙운동 네오까떼꾸메나도의 행사에 자리를 함께 한 프란치스코 교황. (출처: 연합뉴스) 2018.5.5

“죽을 것 같아 도움 청했는데 사제들이 두 번 죽였다”
교황, 바티칸서 피해자에 직접 사과 “내가 문제의 일부”
최측근 펠 추기경 등 전 세계서 아동성추행 파문 확산

[천지일보=박준성 기자] 칠레 주교 성추행 피해자들을 만난 프란치스코 교황이 “내가 문제의 일부였다”며 사과했다. 성추행 의혹이 제기된 칠레 주교를 수년간 두둔해왔던 교황이 입장을 바꿔 자신의 과오를 인정한 것이다.

로이터, CNN 등 외신에 따르면 최근 교황의 초청으로 바티칸에 방문한 성추행 피해자 3명은 교황과의 면담 후 기자회견을 열고 이같이 밝혔다. 아동성추행 피해자인 후안 카를로스 크루스, 호세 안드레스 무리뇨, 제임스 해밀턴은 공동성명을 내고 “우리는 거의 10년 동안 교회 내 성적 학대와 은폐에 맞서 싸운다는 이유로 적으로 여겨졌다”며 칠레 주교들을 비판했다. 이들은 교황에게 성범죄에 연루된 칠레 주교들에 대해 실질적인 조치를 취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올해 1월 칠레를 방문한 교황은 사제의 아동성추행 은폐 의혹을 받아온 후안 바로스 주교에 대해 “모든 것은 중상모략이다”며 옹호하고 나서 비판을 자초했다. 은폐 의혹의 당사자로 지목된 바로스 주교는 1980년부터 1995년까지 수십 명의 미성년자를 성추행한 사실이 드러나 2011년 면직당한 페르난도 카라디마 신부의 제자로, 카라디마 신부의 성추행을 묵인해왔다는 비판을 받았다.

교황은 당시 바로스 주교의 죄에 대한 어떤 증거도 받아보지 못했다며 두둔했다. 곧바로 칠레 성추행 피해자들과 국민이 분노를 표출했다. 논란이 확산되자 교황은 한발 물러서 마음의 상처를 안겨준 발언에 대해 사과했다. 이후에도 비판 여론이 수그러들지 않자 교황청은 지난 2월 성추문 조사 전문가인 찰스 시클루나 대주교를 칠레로 파견해 진상조사에 나섰다.

카라디마 신부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던 피해자인 크루스가 2015년 교황에게 피해 사실을 자세히 설명한 편지를 공개하면서 논란이 더욱 확산됐다.

상황은 진상조사단이 교황에게 방대한 분량의 보고서를 전달하면서부터 급반전됐다. 교황은 지난달 칠레 주교 성추문과 관련해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다고 사과하고 나섰다.

조사단을 이끈 시클루나 대주교는 성추행 피해자들과 만나 문제를 집중 조사했다. 조사단은 64명의 피해자를 만나 인터뷰하고, 이들의 증거 등을 수집해 2300페이지 분량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이를 받아본 교황은 칠레 주교들에게 서한을 보내 “진실하고 균형 잡힌 정보의 부족으로 상황에 대한 판단과 인식에 심각한 오류를 범했다”며 “조사단 서류를 읽으면서 판단이 바뀌었다. 나는 고통과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거듭 사과의 뜻을 내비쳤다. 교황은 조만간 칠레의 주교 32명을 긴급 소집해 성추문과 관련한 회의를 연다.

교황의 사과를 받은 크루스는 “우리는 매우 솔직하게, 직접적으로 말했다. 교황이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하다”는 점을 알렸다고 했다.

또 다른 피해자 해밀턴은 카라디마 신부에 대한 압도적인 증거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을 무시한 주교들에 대해 “내가 고통스러워 죽을 것 같을 때 (칠레교회 관계자들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으나 그들은 나를 두 번 죽였다”며 학대를 은폐한 주교들을 감옥에 갈 만한 ‘범죄자들’이라고 칭했다.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성추행 문제는 칠레에 국한된 사건이 아니라는 게 더 심각하다. 교황의 최측근이자 고위 인사들도 자유롭지 않다. 교황청 재무원장으로 가톨릭교회 서열 3위 최고위급인사인 조지 펠 호주 추기경은 지난 3월 호주 법정에 출석해 본격적인 법정다툼을 앞두고 있다. 펠 추기경은 성추행 혐의를 강하게 부인하고 있지만 다수의 피해자가 고소하며 진실공방을 예고하고 있다.

2013년 호주 연방정부가 신설한 특별조사위원회는 호주 전역에서 벌어졌던 가톨릭교회 아동성범죄를 조사했다. 특조위가 지난 2016년 2월 공개한 자료에 따르면 1980년부터 2015년 사이 ‘어린 시절 가톨릭 사제로부터 성추행을 당한 적이 있다’고 신고한 이가 4444명에 달해 충격을 줬다. 피해자의 95%는 남자아이였고, 학대를 받을 당시 평균 나이는 10~11세였다. 아동성추행의 가해자로 지목된 이들이 1880명에 이른 것으로 확인됐다.

지난해 BBC, 가디언 등 외신들은 독일 남부 레겐스부르크의 돔슈파첸 성가대 학교 남학생 최소 547명이 지난 1945년부터 1990년대 초반 사이 사제들로부터 구타 등 신체적 학대와 부적절한 성폭력을 받을 사실을 보도해 파문이 일었다. 특히 1964년부터 94년까지 성가대를 이끈 게오르그 라칭거 신부는 베네딕토 16세 전임 교황의 형이라는 사실이 알려져 더 큰 충격을 준 바 있다.

칠레와 호주, 독일, 미국, 프랑스 등 전 세계적으로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성범죄 사실이 속속 드러나면서 교황청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는 게 사실이다. 교황은 2013년 취임 후 “사제들의 성범죄는 끔찍한 신성 모독”이라고 비판하며 ‘성범죄 무관용 정책’을 펼쳐왔다.

교황이 가톨릭의 큰 오점으로 기록될 사제 성추행 논란을 해소하기 위해 어떠한 해법을 제시할지 교황청 안팎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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