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백성(百姓)의 가난이 국가의 책임이 된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도 가장 최근세사의 일이다. 만약 이 시대에 끼니를 못 때워 목숨을 잃도록 방치된 백성이 어디 있다면 민생을 책임지는 정치 및 행정 계통상의 숱한 공복(公僕)들이 자리를 내놓아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이 현대 복지국가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옛날이라면 백성이 굶주리거나 배주려 죽는다고 해서 지방 수령방백(守令方伯)이나 궁중 대신들의 군림하는 지위에 이상이 생길 수가 없다. 사실상 가난은 그저 가난하고 불쌍한 그 백성 개인 당사자의 책임이고 문제일 뿐이었다. 임금도 백성의 가난은 구제하지 못한다고 했다는 말의 의미하는 바가 바로 그것일 것이다. 따라서 엄격한 신분제의 그 시대에는 임금은 임금, 고관대작은 고관대작, 기타 벼슬아치는 벼슬아치로서 백성과 유리되어 ‘함께(together)’가 아니라 따로 가는 특권 계급일 뿐이었다. 말로는 민본(民本)이 강조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국가와 백성을 한 몸이라고 할 때 실제로는 머리 따로, 꼬리 따로이기 마련이었다. 

지금은 국가와 국민이 거의 완벽하게 한 몸으로 ‘함께’ 간다는 팩트(fact)에 대해 긴 설명을 필요로 하는 시대는 아니다. 그만큼 국가 시스템과 민생이 톱니바퀴가 맞물리어 돌아가는 기계처럼 유기적 관계로 일체화돼있다는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바로 국가와 국민은 한 몸이며 공동운명체다. 이것이 국민이 나라의 주인인 현대 민주복지국가의 기본적인 작동 원리다. 이런 시대에는 국민이 불행한 데 국가가 행복할 수 없고 국가가 불행한 데 국민이 행복할 수 없다. 국가의 행·불행과 국민의 행·불행이 동조(同調) 현상을 보인다 할 수 있다. 특히 국가 경영 시스템의 골격과 그 운용자 및 지도자가 국민의 선거를 통해 결정되는 국가는 국가 경영과 통치 행위에서 일방 독주(獨走)나 불통(不通)을 금기시해야 하며 권력 핵심은 편파적 작당(作黨)의 소아적(小我的) 유혹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편파적 작당’이라는 것은 이를 테면 박근혜 대통령을 하야나 탄핵의 정치적 위기로 몰아넣은 ‘권력 사유화’ 스캔들과 같은 일이다. 

맹자는 말하기를 ‘천하의 백성과 함께 즐기고, 천하의 백성과 더불어 걱정하고서 임금 노릇 제대로 못한 사람은 없었다(樂以天下 憂以天下 然以不王者 未知有也/낙이천하 우이천하 연이불왕자 미지유야)’고 했다. 맹자의 이 말마따나 국가의 지도자들은 특히 최고 지도자는 권력과 권위를 공평무사하게 행사해야 하며 인재를 고루 발탁하고 소수 패거리가 아니라 국민과 넓게  대화하며 즐거움이나 걱정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그래야 나라가 평화롭고 국민이 행복하며 민생이 안정될 수 있다. 맹자는 기원전 3~4세기의 아주 먼 옛날의 현인(賢人)이다. 정치 환경이 아주 복잡한 현재에 단순했던 시대의 그의 말이 완벽한 정치 교과서 노릇을 할 수는 없지만 정치인의 기본 소양을 가르치기에는 조금도 모자람이 없다. 놀랄만한 일이다. 고개를 들어 나라밖의 다른 나라 국민들을 바로보기조차 창피스러운 현재의 ‘난국(亂局)’이 초래된 것은 바로 정치인이 가져야 할 그 기본 소양의 결여 탓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우리의 정치 수준이 맹자가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에 이미 가르쳤던 그 기본 소양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음을 여실히 증명하고도 남는다. 바꾸어 말하면 과거 정치인들의 참담한 수난사(受難史)와 ‘국민 파워(people power)’에 의해 민주화에 이르는 굴곡진 정치 발전 과정을 경험하고서도 그로부터 살아남은 우리 정치인들이 거기서 배운 교훈이 별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과 같다. 이것 또한 놀라운 일이다. 대신 우리 정치인들에게 특징적으로 돋보이는 것은 마키아벨리즘(Machiavellism)적인 권력욕이다. 동시에 국민과 사회에 맹독(猛毒)이 미침에도 그런 마키아벨리즘적인 권력 패권주의에 바탕을 둔 패거리 진영논리와 권력 쟁취 및 유지 목적을 위한 ‘수단의 정당화’, 국민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정파 이기적 싸움질을 위한 소질을 개발하는 데 주력해왔다는 점이다. 이렇기에 우리 정치인들에게는 국민을 감동시킬 정치 철학과 비전(vision), 국리민복을 위한 대의(大義)에 대한 공감이 부족한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며 민의의 수렴과 정치적 해법의 도출을 위한 타협의 기술과 미학으로 충분히 무장하지 못한 것도 이상할 것이 없다. 이것이 새삼 걱정거리인 것은 ‘하야냐 탄핵이냐’ 하는 대통령의 퇴진 방법과 시기, 해법을 합의 도출해야 할 숙제가 정치권에 넘겨졌기 때문이다. 

벼랑 끝의 정치 위기에 몰린 박근혜 대통령은 이미 ‘임기단축을 포함한 자신의 진퇴 문제를 국회의 결정에 맡기겠다’고 발표해놓고 있다. 벼랑 끝에서 자신이 내려갈 사다리를 국회가 마련해달라는 말로 들린다. 야당은 이에 즉각 반발해 함정이 있는 제안이라거나 심지어 복선이 깔린 잔꾀라는 등의 반응을 보임으로써 합의의 순산(順産)을 예상하기는 어려워졌다. 합의의 칼자루를 쥔 야당이 바라는 ‘최선(the best)’이 명확히는 무엇인지 나와 있지 않으나 만약 이것이 ‘차선(the next best)’의 수용을 결단코 배제하는 것이라면 국민이 지금 걱정하는 정치 위기는 단기간에 수습될 수 없다. 야당만이 아니다. 여당이 경직되게 협상에 임할 때도 마찬가지다. 친박(親朴), 비박(非朴)으로 갈리어 내부가 어수선한 여당의 책임은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이럴 땐 대통령의 잘못에 의한 나라 망신과 정정(政情)혼란으로 엄청 화가 나있으면서도 자제력과 침착성을 잃지 않고 있는 국민에 물어봐야 한다. 국민의 뜻이 여야가 생각하는 것과 최선으로 일치하든 차선으로 일치하든 그들은 국민의 뜻을 최대한 수렴해야 마땅하다. 첨예하게 대립하는 정파들이 대립하는 정치적 합의에서 최선을 얻어낸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일 수 있다. 정치는 차선의 추구라는 말도 있다는 것을 새겨들어야 한다. 

사실 대통령 퇴진 방법과 시기에 관한 여야의 절충과 합의가 쉬운 작업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이렇게 보아 우리의 정치권과 여야, 국회가 목하 결정적인 시험대에 올라 섰다. 어느 쪽에는 최선에 가깝고 어느 쪽에는 차선에 불과하더라도 합의는 반드시 이루어내야만 한다는 점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청와대의 권력 비리와 스캔들이 국민을 불행하게 하는 일이 다시는 재발하지 않게 하는 계기를 이루어내야 한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국가와 국민이 공동운명제인 시대에 기본 소양이 모자라는 사람이 국가 지도자가 돼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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