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서방의 경제 제재에 고통 받던 러시아에 역사 무대의 새 주인공 트럼프(Trump)의 등장은 언 땅을 녹이는 봄비와 같다. 그는 이미 대통령 선거 기간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을 여러 차례 강조해왔었다. 그때는 그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는 믿음이 확실치 않았기에 크게 주목받던 사안은 아니었지만 대통령이 된 지금 그로부터 터져 나오는 조치들은 세계를 숨죽이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중에서도 러시아 대통령 푸틴과 오랜 지기(知己)로 지내온 다국적 석유기업 엑슨 모빌의 CEO(최고경영자) 렉스 틸러슨의 미 국무장관 내정이 가장 극적이다. 이 조치에 러시아와 연합해 미국을 견제하려던 중국과 대러시아 제재에 미국이 꼭 필요한 유럽이 거의 혼절할 만큼 충격을 받았다. 반면 푸틴은 입이 귀에 걸렸다. 풍랑에 배가 흔들릴 때는 몸도 따라 움직여야 멀미를 피할 수 있다. 그런데 이 격변기에 정치 혼란에 빠져 국정의 동력을 잃고 엉거주춤 있어야 하는 우리의 모습은 큰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복잡한 것이 국제적 이해관계여서 트럼프 시대의 미·러 밀월(蜜月)이 양국의 국익에 맞추어 술술 풀려 나갈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로되 목하 트럼프와 푸틴이 주관하게 될 새 미래를 위한 준비만은 양국 사이에 착착 진행이 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것을 실증하는 것은 양측 요인들에 의한 빈번한 접촉과 왕래다. 틸러슨이 직접 러시아를 방문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트럼프 시대의 대러 외교의 주역이 될 미 행정부의 주요 인사들의 러시아 방문도 늘었다. 러시아 측 주요 인사들 역시 이에 호응해 트럼프 측 요인들과 인사들과 접촉을 늘려 나가는 것은 더 말할 것 없다. 미국과 러시아의 이런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지 않을 주요 국가는 있을 수 없는 형편이어서 다른 나라들도 그 흐름의 의미를 읽고 그런 흐름에 따라 붙기 위해 바쁘다. 중국 역시 양국의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고심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일본은 아베 수상이 직접 나서 세계에서 가장 먼저 트럼프를 찾아가 만났으며 러시아의 푸틴은 자신의 고향 온천에 초청해 감성 외교를 시도하기도 했었다. 모두가 이렇게 들썩이며 발 빠르게 움직인다. 세계 외교의 토대와 기축이 바뀌는 격변의 순간이기 때문에 그것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중국 사람들 스스로 그들 미디어를 통해 트럼프의 새로운 외교 실험을 러시아와 연합해 중국을 견제하려는 것, 바로 ‘연아제화(聯俄制華)’라 거리낌 없이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은 미·중 수교의 배경과 정반대다. 미국이 냉전 시대에 중국과 손을 잡은 것은 당시 ‘소련’의 위협에 맞서기 위해서였다. 그 반대인 ‘연화제아(聯華制俄)’였다. 중국으로서도 중·소 사이에 국경분쟁과 이념분쟁이 양국 적대감의 골을 깊게 하고 있는 때여서 미국이 한국 전쟁 때의 원수였지만 그 미국과 기꺼이 손을 잡지 않을 수 없었다. 적의 적은 친구다. 따라서 중국은 미국에, 미국은 중국에 공통의 적 소련의 적으로서 서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세월을 이기는 것은 없으며 세월이 감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 빼고는 변하지 않는 것이 없다.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미국의 근처에도 접근할 수 없었던 마오쩌둥(毛澤東), 주은라이(周恩來) 시대의 공산주의 중국은 덩샤오핑(鄧小平)의 실용주의 노선에 따라 ‘굴기(崛起)’해 어느 새 이른바 G2의 강국이 되어 사사건건 미국과 아옹다옹 다투는 처지로 변했다. 그들의 군사력 역시 첨단 전력 위주로 몰라보게 신장돼 때에 따라 세계 군사 최강국 미국과도 한판 붙어보자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그들의 항공모함 함대와 전폭기들은 미·일 양국의 봉쇄선을 뚫고 태평양에 진출하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도리어 미국의 함모 전단이 그들의 둥평(東風)31 등 항모 타격 미사일의 사정권에 드는 것을 두려워해 점차 중국 연안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 최근의 형편이다. 

트럼프는 이런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이 소련을 적으로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갈파하고 있었다. 소련은 G2로 굴기한 중국에 펄펄 나는 날개가 돼준다. 소련이 중국의 친구로 배후에 있는 한 미국은 태평양에서 점차 더 본토 쪽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오바마 대통령과 같은 수세적 방어적 타협적 소극적 외교가 지속되는 한 그렇다. 오바마는 ‘아시아로의 회귀(pivot to Asia) 정책’을 부르짖었지만 중국을 압박하는 실질적 성과보다는 레토릭(rhetoric)에 그치고 말았다는 인색한 평가를 피하기 어렵다. 하지만 트럼프 행정부가 들어서면 어느 쪽이 더 손해를 볼진 모르지만 미·중 관계가 한층 복잡하게 꼬이고 어지러워질 것이라는 전망은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트럼프는 절대로 중국에 말랑말랑하지 않을 것이며 중국이 소련을 배후에 업고 미국에 강하게 대시(dash)하는 것도 허용하지도 않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이다. 그는 벌써 타이완의 차이잉원 총통과 이례적인 통화를 가져 중국이 집착하는 ‘하나의 중국’ 원칙을 건드렸다. 중국이 발끈했지만 트럼프는 태연하다. 남중국해에서 중국군에 탈취당한 수중 드론(drone)에 대해서도 “중국이 훔쳐간 것이며 되돌려 받지 말라” 했다. 이것에 당황한 쪽은 중국이다. 그들은 트럼프가 그만두라 했지만 멋쩍게 드론을 반환했다. 중국은 ‘호락호락하지 않는 차이잉원’의 타이완을 위협하기 위해 폭격기 편대를 동원해 타이완 영공 밖에서 위협 비행을 감행했다. 미국과 일본은 타이완에 대한 중국군의 동향을 항시 감시한다. 중국의 폭격기 편대에 맞서 일본은 F15 팬대, 미국은 RQ4고고도 무인정찰기를 띄웠다. 이렇게 세상은 한 시도 편안할 날이 없다. 트럼프가 정식으로 취임했을 때 미·중 관계가 과연 어떻게 전개돼 나갈 것인지 이것만으로는 확실한 감을 잡기는 어렵지만 그것이 결코 우리와 상관없는 얘기일 수 없다는 것만은 명백하다. 

모두가 자신의 생활에 바삐 쫓겨야 하는 2016년 연말에 우리는 과거에 차분한 성찰과 미래의  설계를 위해 애쓴 것이 아니라 수백만 연인원이 동원된 길거리 시위에 뛰쳐나와 금쪽같은 시간을 보냈다. 나라 밖 격동에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다. 그렇지만 그 시간이 낭비가 아니라 바른 역사를 위한 보약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 우리가 안은 준엄한 역사의 명령이라는 것을 마음에 새길 수만 있다면 우리는 도리어 전화위복의 기회를 맞고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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