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괴테 작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독일 문학사에서 ‘질풍노도(Sturm und Drang)의 시대’를 대표한다. 주인공 베르테르는 이미 알베르트라는 약혼자가 있는 여인 로테를 사랑하지만 그 비뚤어진 사랑에 의해 구원받기는커녕 좌절과 울분에 싸여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이것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큰 줄거리이다. 그러니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출발부터 잘못된 ‘불행한 사랑놀이’를 소재로 다룬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속담을 빌리자면 ‘천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 했는데 약혼자가 있는 로테의 마음에 큐피드(Cupid)의 것과 같은 ‘사랑의 화살’을 꽂은 베르테르의 사랑은 바로 그 ‘첫 걸음’부터가 잘못된 사랑이었다. 그렇다고 ‘자살’이 반드시 필연적인 귀결이고 결말이어야 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럼에도 극단적인 결말을 선택해 소설을 마무리한 괴테의 의도가 명확한 것은 아니지만 그가 ‘질풍노도’와 같은 감정이 일렁이는 ‘질풍노도 시대’의 대표성을 지니기에 모자람이 없는 작품을 쓴 것만은 틀림없다.    

우리에게 2016년은 문학사적인 측면에서가 아니라 미래로 가는 역사의 운행 과정에서 온 나라에 폭풍우가 몰아치고 격랑(激浪)이 심하게 인 바로 ‘질풍노도(疾風怒濤)의 시기’였다고 기록될 만하다. 국민은 거친 바다처럼 격노해 봉기하고 대통령은 국민의 힘(people’s power)에 의해 심하게 압박을 받은 의회에 의해 탄핵을 당했다. 이른바 대통령이 용인한 사적 인연의 ‘비선(秘線)’에 의한 권력의 사유화와 국정농단이 발단이었지만 그에 항의해 일어선 시위 군중이 아무리 질서정연한 모습을 보여주었더라도 정치와 국정 시스템의 마비를 가져와 사회가 혼란의 도가니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백척간두(百尺竿頭)의 위기에 처한 경제와 안보는 잠시의 국정 공백일지라도 그 관리 부재가 이기지 못할 부담이 되어 마치 ‘낙타의 등을 부러뜨리는 최후의 지푸라기(the last straw that breaks the camel’s back)’로 작용할 위험마저 안고 있는 때였다. 이런 비상한 시기였기에 대통령에 의해 초래된 ‘질풍노도’와 같은 사회 혼란과 국정공백이 국민을 더욱 좌절의 막다른 심경으로 몰아넣어 분격(憤激)케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가 증명하지만 우리 국민은 불의가 썩은 강물처럼 흐를 때 분연히 일어나 행동하는 과감하고 불같은 역동성을 지녔다. 그것이 우리네 국민정신이다. 대통령을 탄핵에 이르게 한 2016년의 질풍노도 같은 ‘국민 행동’ 역시 추호라도 그 같은 역사적 역동성을 이어가는 줄기찬 흐름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이 나라의 희망적인 미래에 대해 얘기하는 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필시 우리는 그것에 대해 무한한 자부심을 가슴속에 싹틔울 수 있다. 그렇더라도 회고컨대 지도자의 실정(失政)과 과실에 의해 사회 혼란과 국정마비에 좌절하고 걱정하며 분격해야 했던 2016년 한 해는 우리에게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아야 할 정치적 인재(人災)에 의한 ‘끔직한 한 해(Annus horribilis/horrible year)’였다는 것이 어느 모로 보나 분명해진다. 

작은 편차일지라도 첫 걸음이 잘못 디뎌진 천리 길은 마지막 종착지가 전혀 의도하지 않은 아주 엉뚱한 곳이 되고 만다. 그 같은 결말을 예고나 하듯이 박근혜 대통령의 권력 행사는 ‘첫 걸음부터’ 뭔가가 ‘잘못 간다’ ‘이상하다’ 싶었었다. 사필귀정으로 대통령을 탄핵에 이르게 한 잘못이 무엇인가에 대해 한두 가지만을 꼽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초기에 국민에게 가장 강하게 어둡고 야릇한 느낌을 전달한 잘못은 시행착오가 거듭된 갖가지 인사였다. 지연(地緣)을 비롯해 어떤 고질적인 연고에도 편중되지 말았어야 할 인재 발탁이 지나치게 ‘특정한 연(緣)’에 치우쳤었던 것은 두 말할 것도 없거니와 그나마 뽑힌 ‘재목’은 ‘감’이 되지 않아 번번이 정실과 편파성(favoritism)이 깊숙이 개입된 인사라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국민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그 물증을 확보할 수가 없었다. 급기야 2016년 ‘끔찍한 해’에 권력의 그늘에 독버섯처럼 피어 개인적인 인연과 친소(親疏)관계를 토대로 자기들끼리 밀고 끌어주고 챙겨주며 국정의 가장 중요한 축인 인사를 왜곡시킨 ‘비선 실세 생태계(生太系)’의 작태가 모습을 온전히 드러냄으로써 어렴풋하던 수수께끼의 답이 환해졌다. 통분을 금할 수 없었다. 인사는 예나 지금이나 국가 경영에서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인사가 만사(萬事)라고 말하지 않나. 국정의 메커니즘(mechanism)을 돌리는 것은 법과 시스템이지만 궁극적으로 사람이 그것을 운용하기 때문에 인재를 골라 쓰는 인사가 중요할 수밖에 없다. 인사야말로 국민 복지 및 국민 행복과 직결되는 국가 경영의 중대사다. 조선 세조의 왕위찬탈에 반대한 생육신(生六臣)이자 올곧은 재야(在野)선비였던 김시습(金時習)은 궁중의 인사가 못마땅할 때마다 ‘이 나라 백성이 무슨 죄가 있어 이 따위 인사가 이루어지나’라고 통탄했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지금도 인사 정책에 실패한 국정책임자가 있음에 비추어 김시습이 얼마나 인사가 민생과 직결되는 국가의 중대사인가를 일찍 깨달은 선각자였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다.

어떻든 역사의 흐름을 슬기롭게 타고 넘기 위해서는 정치인들과 국민들이 행동에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아는 진퇴(進退)의 문제에서 흠이 잡히지 않아야 한다. 불의의 권력에 굴욕을 안긴 2016년의 격렬한 시위와 어둠을 밝힌 촛불의 점화는 어느 때보다 동기가 순수했지만 도리어 그 승리감 때문에 제동이 제때에 완벽하게 걸릴지에 대해 장담하기가 아직 이르다. 물론 권력의 호위무사들이나 친위대 잔당들이 국민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보스에 대한 결초보은을 외치며 국민의 의사에 역류(逆流)를 꾀하는 마당이어서 행동을 멈출 때인지 자체가 불분명한 것도 사실이지만 멈출 때가 되면 멈출 줄 알아야 되치기를 당하지 않는다. 정치는 정치인들에게 돌려주어야 한다. 정치인들은 ‘다음의(next)’ 큰 권력을 손에 쥐기 위해 필요하다면 국민들이 행동을 멈추어야 할 때일지라도 선동을 멈추지 않고 이용하려는 경향을 보일 수 있지만 이 역시 지양되는 것이 대국적인 국가 안정과 국민 행복을 위해 옳다. 어떤 경우에나 국민들이 항상 깨어 있어 사악한 손들에 이용당하지 않아야 한다. 그래야 ‘끔직한 한 해’를 동시에 ‘경이의 한 해(Annus mirabilis/wonderful year)’로 바꾸어 놓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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