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조용하던 온 동네가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개 한 마리가 갑자기 짖기 시작하더니 이내 온 동네 개들이 뒤따라 어지럽게 짖는다. 도둑이 들었을 수도 있지만 개들은 가끔 이렇게 달빛에 아른거리는 나뭇가지의 헛그림자를 보고도 짖는 버릇이 있다. 그러면 다른 개들도 그 짖는 소리에 덩달아 요란하게 짖어대기 시작한다. 이것이 이른바 고사에서 말하는 ‘일견폐형 백견폐성(一犬吠形 百犬吠聲)’이다. 이는 대통령과 그의 비선을 둘러싼 국정농단 스캔들로 한 시도 조용할 날이 없는 요즘의 우리네 형편에 딱 맞는 좋은 패러디(parody)가 될 성 싶다. 사람들이 모여 떠드는 항간의 화제도, 각종 매체들이 역점을 두고 다루는 센세이셔널(sensational)한 토픽(topic)들도 온통 그 얘기들뿐이다. 귀가 따갑고 짜증이 날 정도지만 희대의 권력 스캔들이어서 온 동네가 요란하게 뒤집어질 뜨거운 화제가 되는 것을 피하기는 어려운 것 같다. 다만 과장된 부풀림은 좀 피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급기야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기록적인 100만 인파가 광화문광장에 운집해 대통령 ‘퇴진’을 외치며 와글거리기도 했다. 이만한 인파가 모인 일은 역사에 일찍이 없었다. 심지어 분노의 함성은 무한정 저변이 넓어져 사회 참여보다는 면학(勉學)에 몰입해야 될 고등학생 중학생 초등학생으로부터도 터져 나오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들의 이런 나라 걱정을 어떻게 기특하다고만 할 수 있는가. 학부모들에게는 적잖은 시름거리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일도 역사에는 일찍이 없었다. 대통령은 이미 두 번이나 국민에 고개를 숙여 사과했지만 민심의 정곡(正鵠)을 놓친 미진(未盡)함이 오히려 이렇게 국민들의 분노에 기름을 부었다. 결국 자신의 책임이지만 대통령 비선에 의한 ‘권력의 사유화와 국정농단’ 스캔들이 유발한 국민 분노는 그만큼 억누를 길이 없고 그것으로 입은 국민의 상처 또한 치유가 불가능할 만큼 깊다는 것을 웅변하고도 남는다. 

우리만큼이나 숱한 곡절과 희생을 치르고 쟁취된 민주주의 시스템에서는 권력이 국민을 이길 수는 없다. 국민들이 아직도 대통령이 민의와 사태의 심각성을 제대로 모르고 버티며 미적거린다고 말한다면 사태의 해결까지는 아직 거리가 요원하다. 지금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고 할 수 있다. 민의는 간단명료하게 ‘퇴진’으로 드러났다. 이에 비해 대통령의 미적거림은 길게 느껴진다. 그렇기에 그가 결코 민의에 오불관언(吾不關焉)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성 문을 굳게 닫고 눌러 앉아 공격을 방어하는 일종의 시간 벌기 농성(籠城)’, 말하자면 ‘청와대 농성’을 벌이고 있다는 시각이 국민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는 세칭(世稱) 불통 대통령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사후약방문(死後藥方文)이거나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것이기는 해도 요동치는 시국에 발 빠르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국민들의 성화에 그 역시 어지간히 초조해졌음을 말해준다. 늦긴 했지만 지금의 모습은 결코 ‘불통’이라 할 수 없다.  

그는 완강하게 경질을 거부해왔던 청와대 문고리 3인방을 쳐냈다. 각계 원로들을 청와대로 모시기도 하고 국회의장을 찾아가기도 했다. 그의 불통 기질로 이루어지지 않던 야당과의 대화도 지금은 그가 거절해서 이루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다. 야당과 대화하자고 매달리는 것은 이제 바로 대통령 자신이다. 그런 대통령의 속을 태우는 것은 이리 재고 저리 재고 정치적 주판알을 굴리느라 대화를 주저하는 야당이라는 것을 국민들은 눈여겨 지켜본다. 심지어 제1야당의 대표는 대통령과의 청와대 회동을 발표해놓았다가 당내의 찬반 갈등으로 하루밤새에 손바닥 뒤집듯 번복하기도 했다. 아무리 정치적인 ‘갑’과 ‘을’이 뒤바뀌었어도 대통령과의 약속이었는데 ‘그러는 것은 아니다’라는 비난을 살만했다.

그는 난국의 타개책으로 일각에서 제기된 거국내각과 실권국무총리안에 따라 비록 무위에 그치기는 했어도 노무현 정부 때의 인물을 후보자로 지명하기도 했다. 그의 이런 변화된 모습으로 보아 그 역시 벼랑 끝에 몰린 절박감, 오도 가도 못하는 진퇴유곡(進退維谷)의 위기감에 사로잡혀 있음을 알게 해준다. 진즉 그리 했어야 옳았던 일을 너무 오랫동안 몇몇 비선 패당과 소수 권력 인터 서클(inner circle)에 휘둘리고 그들의 달콤한 소리에 귀를 저당 잡혀 사태를 그르치고 말았다. 하다못해 언론과 정치권의 쓴소리는 고사하고 일반 국민과 시정(市井)의 뜬소문에라도 일찍 귀가 열리고 눈을 떴더라면 ‘일견폐형 백견폐성’과 같은 최악의 사태를 맞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어쩌랴, 일은 이미 벌어지고 우유는 엎질러지고 만 것을. 그는 고립무원이다. 예수의 사도 베드로가 예수가 수난 당하는 현장에서 붙잡힐까 두려워 3번이나 예수를 부인했듯이 측근이었던 사람들도 살 길을 찾아 그를 부인하기에 바쁘다. 그것이 바로 권력이 서릿발 같을 때는 드러나지 않다가 권력이 황혼으로 물들 때 본색이 드러나고야 마는 염량세태(炎涼世態)의 인심이다. 

어떻든 그가 지금부터 마음에 새겨 실천해야 할 것은 마음을 허허(虛虛)롭게 비우고 국민에게 추호의 권력에 대한 미련이나 집착이 남아있지 않음을 투명하게 보여줘야 한다. 그에게는 선택의 폭이 넓지 않아 보인다. 그런 마음의 바탕위에서 하야(下野)든 탄핵(彈劾)이든 국민의 뜻에 따라 방침이 합의되고 정해지는 대로 선선히 거취를 실행에 옮기는 것이 옳다. 기실 민의가 이미 드러나지 않은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사태의 해결 방안도 나와 있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민의에 영합하고 여론에 편승해 파도타기를 즐기는 정치권이 질서 있는 사태의 해결을 방해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들이 명심해야 할 것은, 특히 야당은 다른 나라 같으면 약탈과 방화, 폭동으로 비화되고도 남을 거대한 인파가 몰린 우리네 시위 현장에서는 군중이 결코 이성을 잃지 않았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도리어 과격 행위를 나무라고 대권후보들을 비롯한 시위 현장의 정치인들을 향해 ‘시위를 선동하거나 이용할 생각은 아예 말라’고 일갈(一喝)하기도 했었다. 이것이 시사하는 것은 대통령에 대한 분노와 표리(表裏) 관계일 수밖에 없는 엄연하고도 엄숙한 또 다른 민의다.

국민에게는 ‘교각살우(矯角殺牛)’와 ‘투서기기(投鼠忌器)’의 염려가 있다. 그렇다면 누가 헌정의 완전 파국, 민중혁명과 같은 혼란을 국민이 원한다고 보면 필시 오판이다. 따라서 정치권은 사태를 직시하고 정시(正視)해야 한다. 특히 야당이 그러하다. 시위를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여당 역시 권력에 대한 미련을 접고 야당 및 대통령과 함께 허물을 가리는 노력을 아끼지 않되 질서 있는 사태수습을 서둘러 국민의 행복을 지켜야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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