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청와대가 난공불락의 철옹성 같아도 역대에 국민과의 싸움에서 이긴 대통령이 없었다. 이렇게 보면 그 자리가 좋은 터는 아닌 것 같다. 한 사람도 그 집에서 비참한 일이나 굴욕을 당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누구도 무사하게 자신의 일신(一身)과 영예를 보전하고 지켜내지 못했다. 도대체 왜 그런가. 대통령이 되어 청와대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선(善)한 초심을 잃어버리거나 국민과 불통(不通)의 성벽을 쌓아 버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대통령이 되어 처음 들어서는 권부의 첫 관문인 청와대 문턱을 저승에 있다고 하는 망각의 강, 레테(Lethe)와 비교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레테에서는 최면의 신 히프노스(Hypnos)가 이승을 하직하고 저승에 온 망자들을 맞는다. 그는 망자들에 주절주절 최면을 거는 주문을 외워 잠에 빠지게 함으로써 이승에서 가져온 기억의 파노라마를 깨끗이 지워버리는 일을 한다. 

비유컨대 이렇게 대통령이 되어 처음 들어서는 권력의 심장부인 청와대 문턱은 저승의 히프노스가 아니라 권력자로 변모한 자기 스스로의 최면과 자기 다짐이나 자기 암시에 의해 시정(市井)의 기억을 깡그리 잊게 되는 장소가 아닌가 싶다. 바로 권력의 최면에 걸리어 아주 딴판인 사람이 되고 마는 권부의 첫 관문인 셈이다. 이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 그는 한껏 몸을 낮추어 울고 웃고 애환을 함께하며 국민과 더불어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낸 직전의 인간미 넘치던 시정 국민의 하나라고는 절대로 볼 수가 없다. 지금까지 이 점에서 예외가 없었다. 더욱 대통령을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은 철통같은 경비에 의해 굳게 봉쇄되는 청와대의 물리적 장벽과 인(人)적 장벽이다. 청와대는 어쩌면 옛날 궁궐보다도 더 세상과 절연되고 깊숙한 신판(new) 구중궁궐(九重宮闕)과 같은 곳이다. 대통령은 이런 곳에서 황제의 그것에 맞먹는 권력을 행사한다. 우리의 대통령 제도가 그런 막강한 권력을 대통령에게 부여해놓은 것이 사실이다. 더구나 서릿발 같은 권력 앞에서는 역린(逆鱗)을 건드리는 간언(諫言)보다는 감언(甘言)이 쏟아지기 마련이다. 박근혜 대통령에게도 그러했다고 생각된다. 

이런 분위기에서 대통령이 곧 오만한 권력의 화신이 되는 것은 정해진 코스나 다를 것이 없다. 따라서 얼마 안 가서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국민의 소리가 순하게 들릴 까닭이 없으며 더구나 비판의 소리는 더욱 흔쾌히 수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사사건건 라이벌 정파 및 국민과 싸운다. 이렇게 되어 절대 권력이 피하기 어려운 부패에 대한 방부제이며 권력의 일탈을 다소라도 차단할 수 있는 소통과 언로(言路)는 닫힌다. 일단 이렇게 오만하게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하면 여간 해서는 그것에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는 것이 문제다. 권력에 대한 집착과 미련, 오판과 미몽 때문이다. 그는 판단이 흐려져 자리에서 물러날 마지막 찬스까지도 놓친다. 옛날 러시아의 마지막 차르(czar)인 니콜라이 2세의 경우가 그것을 명쾌하게 웅변한다. 레닌 혁명군이 자신의 궁궐 집무실에 난입해 그의 목에 총검을 들이대고서야 그는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절망하지 않았었나.      

솔직히 남의 불행에 대해 입에 담는 것을 좋아하진 않지만 박근혜 대통령으로부터도 결단의 골든타임(golden time)은 지나간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을 국민들은 안고 있다. 사람에게는 절박할 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살자하면 죽고 죽자하면 사는’ 역설이 통한다고 말해져왔다.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높이면 낮아지고 낮추면 도리어 높임을 받게 된다(Everyone who exalts himself will be humbled, but he who humbles himself will be exalted)’고도 했다. 사람이 무엇에게든 욕심이 생겨 마음에 가득할 때는 정확한 상황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다. 특히 끝까지 권력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정치인들의 경우는 더욱 심하다. 권력은 대저 목숨을 담보로 잡는 속성을 지니는 것이지만 만약 권력자가 저와 같은 경구와 진리를 헤아리는 혜안을 가져, 때에 맞춰 처신을 결정하고 결행할 수 있다면 다소는 불행을 덜 수 있다. 자신만의 불행이 아니라 국민의 고통도 사회 혼란도 극대화로 치닫는 것을 막는 것이 가능하다. 그런데 대통령이 골든타임을 놓쳤다고 보는 것은 그의 가장 중요한 권력 기반인 당이 그에 대한 분노와 반발로 탈당이 늘고 심각한 분란에 빠져 와해돼가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다 권력 유지의 두 기둥인 법무장관과 청와대 민정수석이 동시에 사의를 표명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렇게 급속히 권력 기반이 무너지는 일은 일찍이 어떤 통치자가 위기에 빠져 허우적거렸을 때에도 없었던 일이다.

사태를 더욱 설상가상으로 몰아간 것은 뒤로 물러서는 듯 했던 대통령의 반격으로 국민과의 싸움이 새 차원에서 가열된 탓만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탄핵이든 하야든 그런 대통령을 물러나게 할 헌법과 법률이 규정한 명백한 조치조차도 주도적으로 합의해 추진하지 못하는 여야 정치권의 좌면우고와 갈팡질팡, 대권욕과 정략에 의한 각개 약진 탓이 더 크다. 만약 이들이 확실한 방략(方略)을 가지고 일치된 목소리를 낸다면 아무리 고집불통의 대통령인들 무슨 수로 견디어 낼 것인가. 그랬더라면 사태는 어떤 식으로든 벌써 개운하게 결말이 났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이른바 대권주자를 비롯한 정치인들은 시위현장을 기웃거리거나 순회하기에 바빴다. 자신들의 정치적 헌법적 방략을 설득하기보다는 시위민심에 영합하거나 그것을 선동하는 데 정신이 없었다. 그리했기에 혼란한 시국에 민심의 중심을 잡아주고 사회 혼란을 막아줄 당연한 그들의 책무에 충실하기보다 거꾸로 혼란에 기름을 붓고 해결을 지체시켜왔다는 비난이 비등하게 일었다. 국민은 나라 망신을 빨리 끝내고 국가를 정상화하기 위한 사태의 조속한 해결을 원한다. 바로 정치인들이 해주어야할 일이 아닌가. 

난세에 영웅이 출현한다는데 이는 국민들의 은근한 기대일 수 있다. 국민이 느끼는 일종의 인물 갈증이다. 현재의 혼란을 수습하고 건강하고 올바른 국통(國統)을 후대에 물려줄 영웅적인 지도자가 그렇게 없는 것인가. 국민들이 거친 바다처럼 화가 나있는 상황에 파도타기 하듯 몸을 드러낸 대권주자들의 활동이 기민하다. 이들은 청와대 문턱을 넘어서더라도 국민을 배신하거나 실망시키지 않을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그 말에 마음 한구석이 허탈해지는 것은 야심가들이 청와대에 가기 전에는 그 전에도 다 그렇게 말했었으니까 그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