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은 아마 자신도 ‘확신한 승리’는 아니었을 것 같다. 당 후보 경선에서 승리한 그가 마뜩치 않아 후보 교체까지를 거론하며 그와 불화를 빚었던 공화당 지도부가 그의 당선을 예상했다는 증거는 더더욱 없다. 임기 말에 보통은 ‘레임 덕(lame duck)’의 신세에 빠짐에도 높은 인기를 누리면서 힐러리 클린턴 지원을 위해 온갖 동원 가능한 ‘포화’를 퍼부은 오바마 현 대통령 부부 역시 트럼프의 당선은 꿈도 꾸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힐러리의 선거 운동은 오바마 부부의 선거 운동이라 할 만큼 그들 백악관의 부부가 총력을 다 기울인 선거였다. 속속 클린턴 지지를 공개 선언하고 나섰던 주류 언론들도 트럼프가 당선되는 이변에 면목이 없게 됐다. 이처럼 트럼프의 당선은 어쩌면 하얀 백조 무리에 검은 백조(black swan)가 끼이는 것보다도 더 기이하고 확률이 낮은 일로 받아들여질 만하다.

거의 모든 사람이, 특히 정치 전문가, 지식인, 여론 매체 등 통상 여론 주도층이라 공인되던 사람들 중에서 힐러리의 당선에 무게를 두지 않은 사람이 없을 만큼 힐러리의 당선 전망은 이른바 ‘대세(大勢)’였다. 선거 캠페인 과정에서 그런 추세를 무시할 수 없었기에 트럼프 자신도 패배를 예상하고 여러 차례 선거운동과 여론 조사가 조작되고 있다(rigged)는 의심을 제기했을 뿐만 아니라 선거 결과에 불복할 수도 있다며 시비의 빌미를 까는 공언을 했었다. 선거 운동이 이렇게 ‘힐러리의 대세’ 분위기 속에서 치러졌기에 선거에 실패한 힐러리가 11월 8일의 선거 패배를 자신의 몫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전혀 돼있지 않았었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왜 아니겠는가. 그것을 여실히 증명하는 것이 그가 당락이 결정됐음에도 바로 그 날에는 ‘아무 얘기도 하지 않을 것’이라며 짤막한 성명마저도 발표하기를 거부한 것에서 확실해진다. 충분히 짐작이 되거니와 충격이 컸던 것이 틀림없다.

이처럼 트럼프의 당선과 힐러리의 실패를 예상하고 미처 결과에 대비하지 않은 것은 세계 어러 나라들 차원에서도 마찬가지다. 사실 그의 당선을 갈망한 나라는 현 국제 질서의 안정이 자신들의 국익과 직결된다고 믿는 나라들에서는 전혀 없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한마디로 그가 설마 당선될 것이라고 굳게 믿은 나라는 없다. 우리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이래서 그의 당선은 세계 대부분의 나라의 허를 찔렀다. 어떤 형태로든 선거 운동 과정에 그의 선거 캠프(진영)와 알게 모르게 접촉을 가지지 않은 나라는 없을 것이지만 정말 그가 당선될 것이라 확실하게 믿고 일종의 ‘보험’을 든 나라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의 당선은 그만큼 인간의 이성적인 판단을 뛰어넘는 이변이며 기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불행하게도 선거 운동 과정에서 우리와 일본을 집중적으로 두들겼다. 

마치 그는 미국이 일방적인 헌신으로, 노골적으로 말하면 공짜로 두 나라를 지켜주는 것처럼 말해왔다. 그는 말하기를 미국이 엄청난 재정적자를 감수하면서 왜 돈 잘 벌고 부자인 두 나라를 공짜로 지켜주어야 하느냐는 말을 지나칠 정도로 여러 번 되풀이 했었다. 우리나 일본이 미군의 자국 주둔 실비용을 거의 절반 이상 부담하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또 미국과 동맹이기 때문에 얼마나 많은 미국의 무기를 사주어 그들의 경제와 재정에 기여하는가. 그럼에도 이를 모를 리 없는 그는 모르는 척, 이것으로 미국이 과분한 세계 경영 때문에 내치(內治)에 소홀해 재정과 경제가 어렵고 일자리가 사라졌다는 유권자들의 피해의식을 선동했다. 

그는 이에 그치지 않고 한미자유무역협정(FTA)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까지도 미국의 무역적자를 키우고 경제를 어렵게 하며 실업자를 늘리는 원인이라며 재협상에 나설 것이라고 공약해놓은 형편이다. 따라서 그의 당선은 적어도 당장은 그를 한미 간에 형성된 여러 분야에서의 ‘현상(status quo)’과 그것의 원인이며 배경인 ‘그 이전의 상태(status quo ante)’를 이해시키기까지 우리에게 요구되는 수고와 부담이 적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이 마당에 콘크리트 장벽 같던 우리 현 정권의 울타리가 하루아침에 권력의 사유화를 꾀한 자그만 구멍 하나에 무너져 내려 아노미(anomie)에 빠져 헤매고 있는 것이 문제이긴 하다. 하지만 트럼프인들 별 수 있겠는가. 

그가 ‘미국제일주의’의 ‘고립주의(isolationism)’ 공약으로 유권자들을 선동했지만 오늘의 미국이 존재하고 유지되는 것은 그 고립주의로는 결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소요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다. 다시 말하면 그는 곧 한미 동맹과 미일 동맹이 미국이 아무리 돈을 써도 그들의 국익을 위해 폐기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번개가 머리를 스치듯 스스로 각성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는 것이 결코 어렵지 않다는 얘기다. 특히 한국의 가치에 대해서는 그들의 국익을 지키는 최일선의 보루로서 우리가 그들을 필요로 하는 것보다도 더 이상으로 우리를 의미심장하게 평가할 수밖에 없게 될 것이라는 것에 대해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믿는다. 더구나 만약 그들이 미래의 통일 한국의 모습과 그때의 동북아의 정세에 대해 선견지명(先見之明)을 갖고 있다면 절대로 안보적 경제적인 국익의 측면에서 한국으로부터 멀어지려 하지 않을 것이 빤하다. 

트럼프는 워싱턴 정치 프로 주류 세계에서 엉터리 아웃사이더(outsider) 취급을 받아왔다. 실제로 그의 말과 행동이 얼토당토않은 때가 많았다. 그럼에도 그런 초심자를 대통령으로 뽑은 것은 워싱턴 프로 정치의 비능률에 미국 국민이 실망한 때문이라는 것을 주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하지만 트럼프의 당선을 다른 측면에서 민주주의 원조국(元祖國)이라는 나라의 표심(票心)이 초심자의 포퓰리즘에 넘어간 것이라고 본다면 이는 미국 민주주의의 기반이 취약해진 것을 웅변하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세계의 보편적인 정치이념인 민주주의가 위기에 처한 것이라는 평가를 내릴 수도 있다. 바로 민주주의 함정(trap)이다. 그렇다면 정치 이념과 시스템, 그 운용을 둘러싸고 한시도 갈등이 끊이지 않으며 한참 헌법 개정이 토픽으로 등장한 우리로서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를 유심히 살펴 중요한 타산지석(他山之石)을 발견 못 할 것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알 수는 없다. 나무는 그 나무가 맺는 열매로 평가된다고 했다. 혹여 트럼프가 훌륭한 대통령이 된다면 오늘의 미국 국민의 선택이 그때에 가서 새롭게 높은 평가를 받게 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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