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신조어 ‘브렉시트(Brexit)’가 입에 오르내리면서 긴가민가하던 영국(Britain)의 EU 탈퇴(exit)가 현실화되자 영국은 물론 전 세계에 재앙에 가까운 혼란을 불러왔다. ‘Brexit’는 ‘Britain’과 ‘exit’의 합성어다. 1966년생, 50세의 혈기왕성한 젊은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이 애초에 정쟁에 몰려 내건 ‘브렉시트’ 결정에 관한 국민투표(referendum)의 선거공약은 전연 감행할 필요가 없었던 모험이고 도박이었다. 물론 그것이 그의 입신양명과 집권은 가능하게 했지만 동시에 그를 총리직에서 끌어내리게 한 패가망신의 덫이기도 했다. 그는 ‘왜’ 그런 위험하고도 불필요한 모험을 했느냐는 질문에 ‘투표 결과가 그처럼 브렉시트의 찬성이 많은 쪽으로 기울어 나올 줄을 어찌 알았겠느냐’고 했다. 바로 그것이 착각이었다는 것이며 정치인의 그 같은 한 순간의 착각이 빚어내는 재앙에 그 자신은 물론 영국과 전 세계가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망연히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형편이다.

영국의 브렉시트 현실화로 유럽통합을 위해 창설 이래 40여년 역사를 써내려온 EU가 상처를 안 입을 수는 없지만 영국이 입은 상처와 허탈감은 그것을 훨씬 능가한다. 영국 내 브렉시트 찬성론자들은 브렉시트의 국민투표 통과가 EU와 독일 프랑스 등 EU 주도국들에게 통쾌한 한 방을 안겨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그런 기대는 터무니없이 빗나갔다. 오히려 치유가 불가능할 만큼 심대한 타격을 입은 것은 늙은 맹수처럼 비틀거리는 노(老)제국의 처지인 영국 자신이다. 영국은 더 이상 해가 지지 않는 나라도 아니며 세계 도처에 식민지를 두어 영국 자신이 바로 세계 그 자체였던 그런 나라도 더 이상은 아니다. 

그런 처지에서 브렉시트의 노림이 혹여 EU에서 빠짐으로써 EU를 유명무실하게 하고 영국의 존재감을 과시하려했던 감정적인 측면도 있었을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필시 마지막 기력이 다해가는 늙은 제국의 헛된 망상이요 최후의 오기이며 오만이었다. 아무도 영국의 옷소매를 붙잡고 EU에 남아달라고 애걸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리어 기왕 브렉시트가 국민투표로 결정지어진 것이라면 빨리 EU 탈퇴 협상을 시작하고 절차를 밟아 불확실성을 제거하게 해달라고 할 뿐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그렉시트(Grexit)’가 뜻하는 한때의 그리스처럼 EU의 변방을 맴도는 취약한 재정 및 경제구조를 가진 나라들이 보이기 쉬운 EU에서 떨어져 나가려는 움직임을 미리 경계하고 단속하려는 EU 중심 국가들의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다.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 통과 소식에 세계 증권시장의 금융 자산 수백조원이 순식간에 눈 녹듯 녹아 버렸었다. 그것은 기왕지사 어쩔 수 없지만 그 충격과 혼란의 여진이 쉽게 멈출 것 같지 않은 것은 세계의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다. 세계 경제 질서에 편입돼 그것과의 연관성이 밀접한 국가 경제일수록 ‘브렉시트’의 충격에서 벗어나기가 더욱 어렵다. 일본 아베 총리가 ‘양적 완화’를 통해 엔(yen)화를 저평가구조로 가져감으로써 소비를 부추기고 경기부양을 꾀하려던 그의 경제 정책 ‘아베노믹스(Abenomics)’도 브렉시트의 통과로 한껏 커진 세계 경제의 불확실성이 엔화 값을 올려놓아 차질을 빚을 위험에 처했다. 물론 한국 경제 역시 혼란의 수렁에 깊숙이 빠지지 않기 위해 국내 진출 외국 금융자산 이탈 등을 막을 대비책을 마련하며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중이다. 이런 고통을 애꿎게 세계 경제에 안겨놓고 영국이 얻은 실익은 사실상 아무 것도 없다. 나라가 4분 5열 될지도 모를 심각한 국론분열과 앞을 가늠하기 어려운 경제 혼란만을 떠안았을 뿐이다. 

보리스 존슨 전 런던 시장을 비롯한 브렉시트의 찬성을 주도한 정치인들은 ‘EU를 탈퇴해 EU에 내던 분담금을 내지 않으면 그 재원으로 국민복지를 확대할 수 있다’고 국민들을 꾀어 ‘찬성’에 기울도록 했으나 이제 와서는 슬금슬금 발뺌하기에 바빠졌다. 분담금을 내지 않는다 해서 그 재원이 국민 복지 확충에 쓰일 여지가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거나 알고도 모른 척 한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보리스 존슨은 캐머런이 그만 두면 그 뒤를 이을 인물로 명망을 모았었다. 그렇지만 그가 브렉시트의 찬성을 주도했고 EU 잔류를 주장한 캐머런 총리가 사의를 표명한 마당이라 해서 나라가 만신창이가 된 마당에 의기양양하게 총리가 되도록 보수당 안의 여론이 그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지는 않다. 오히려 완강한 저항을 받아 그는 꿈을 접어야 할 형편이다. 이 같은 상황이 의미하는 것은 브렉시트의 통과가 어느 누군가를 승자로 만드는 일 없이 모두를 참담한 패배자로 만들고 말았다는 것을 여실히 웅변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비록 브렉시트 통과에 총리가 다 된 것처럼 파안대소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지만 그 역시도 모두를 패자로 만든 심각한 후유증을 조성한 정치적 책임으로부터는 결코 자유로울 수 없었다. 

브렉시트의 국민투표를 선거공약으로 내건 캐머런을 애써 이해하기로 한다면 총리 자리를 두고 치열하게 다투는 보리스 존슨과 같은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와 기반을 굳히자는 승부욕과 뜻을 정치인은 허다하게 가질 수 있다는 측면에서다. 그렇긴 하지만 캐머런의 생각이 짧았던 것은 ‘브렉시트’를 두고 국론이 ‘In or Out’으로 엇비슷하게 양분된 상황에서 국민투표에서 이기나 지나 후유증은 심각하고 총리 사퇴 압력을 받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것을 그가 몰랐다는 점이다. 만약 그가 이 같은 깊이 있는 생각에 도달할 수 있었다면 국민투표와 같은 혈기왕성한 사람이 저지르기 쉬운 충동적인 모험은 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 그는 또한 변명처럼 말하기를 ‘분파적인 당 내의 인물들이 그 같이 브렉시트 찬성론을 적극 주도할 줄을 몰랐고 역시 브렉시트 찬성기류가 그처럼 독이 퍼지듯 깊고 넓게 번져있는 줄을 몰랐다’고 했다. 하지만 누구의 책임이랴. 캐머런 자신이 혼자 그 책임을 걸머지는 수밖에는 딴 길은 있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만은 아마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고 회한에 마음 아파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데이비드 캐머런일 것이 분명하다. 한 순간의 착각으로 자신은 패가망신하고 나라는 만신창이가 됐으며 세계가 그를 향해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있는 마당이기 때문이다. 정치인이 저지르는 실수의 결과는 바로 이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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