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바람이 세차게 부는 날이면 먼지와 티끌이 어지럽게 일어 눈을 뜨는 것조차 어렵게 된다. 가뭄 때의 비포장 공간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험한 세상을 은유적으로 표현할 때 흔히 동원되는 ‘풍진(風塵)’이란 어휘의 글자대로의 새김(訓)은 이렇게 ‘강풍에 어지럽게 날리는 티끌과 먼지’ 쯤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싶다. 입버릇처럼 말하거니와 이 세상은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험난한 체험이 강요되는, 그야말로 티끌과 먼지로 가득 찬 듯한 ‘풍진 세상’이다. 부자이거나 가난하거나 가진 것이 그저 그렇거나 권력이 많거나 적거나 이 풍진 세상을 사는 고통에서 예외가 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인간 사회에 완전한 평등은 존재하지 않는다. 도리어 자유경쟁이 보장되는 정치 시스템일수록 사회경제적 불평등과 계층의 뚜렷한 분화 및 고착화가 심화돼 가는 것을 안타깝게 바라봐야만 한다. 불평등이 심화될수록 그것을 치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노력이 치열해지는 것은 사실이지만 충분한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인생살이에서 길흉화복(吉凶禍福)만은 어느 누구에게 고착돼 있지 않고 공평하게 순환하며 교차하고 전변(轉變)한다. 그 순환은 마치 행운을 시험하는 죽음의 장난인 러시안 룰렛(Russian roulette) 게임을 보는 것과 같다. 권총이 부자, 권자(權者), 강자, 약자를 가리지 않고 차례로 겨냥해 격발되면서 지나가지만 정작 숨겨진 단 1발의 총알은 누구를 향해 발사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기 때문이다. ‘인생지사 새옹지마(塞翁之馬)’, 이 고사가 말하는 인생살이의 기복(cycle)과 부침(浮沈)의 ‘섭리’를 비켜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것만은 공평하다. 이래서 이 세상은 때에 따라 이상사회인 유토피아(Utopia)이면서 동시에 역(逆)유토피아인 디스토피아(Dystopia)다. 천당이면서 지옥이다. 이렇게 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가 되는 것이 세상 이치여서 이 풍진 세상에서 사람들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좋은 때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용기와 에너지를 얻게 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부질없어 보이지만 그런 생각이 문득 스치는 까닭이 있다. 그만큼 지금 세상이 혼란스럽고 갈등과 다툼으로 아귀다툼을 방불케 한다. 

사람은 신기루 같은 행복과 안일을 추구하지만 물질적 풍요나 고도로 발달된 문명, 정치권력이 인간의 그 갈급한 욕구를 만족스럽게 채워주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행·불행의 기원(起源)과 그것의 치유에 대해 좀 더 본원적인 고찰이 필요한 문제일 것이다. 행·불행을 포함해 일체의 것이 사람 마음의 작용에 의한 것임을 말하는 선각(先覺)의 소리,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가 일깨워주는 가르침도 결코 그와 무관한 것일 수 없다. 오스트리아 출신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는 인간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생(生)의 의욕에 불을 지피는 원초적인 본능에너지인 리비도(Libido)와 그에 상반되는 파괴본능이며 공격본능이자 죽음의 본능인 타나토스(Thanatos)를 처음으로 찾아낸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가 말하기를 ‘인류의 불만은 어떠한 사회적 방법으로도 해결이 가능하지 않으며 문명이라는 것도 단지 그것의 부분적인 해결책에 불과하다’고 설파했었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인간 내면의 성찰을 통해 인간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을 찾기보다는 눈을 밖으로 돌려 아귀다툼이 벌어지는 풍진 세상에서 잘 만들어지지 않는 행복의 조건을 만들어내려 집착하고 헤매기 마련이다. 이로 인해 세상은 더욱 치열하게 개인과 개인, 개인과 권력, 권력과 권력, 세력과 세력이 맞부딪치는 갈등과 대립의 공간으로 변하지 않을 수 없다. 그곳에는 파괴적인 ‘타나토스’의 본능이 횡행하게 된다. 동시에 이런 판국에는 개인에게서 인격적 정체성과 자제력, 자율 및 자결성을 박탈해버리기 마련인 특정 집단이나 세력의 광기(狂氣)가 맹위를 떨쳐 사람들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이런 일에서 사회가 풀려나 안전하고 평화스러워지려면 이른바 사회운영을 책임지는 지도자들이 적어도 사회가 그들을 먹여 살리고 부귀하게 하는 만큼은 양심적이고 도덕적이고 헌신적이어야 한다. 그래야 사회구성원들이 밖으로만 헤매기보다 조용히 내면을 살펴볼 여유를 갖게 되는 것이다. 프로이트 식으로 말하면 지도자들은 원초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편협한 이드(Id)나 에고(Ego)에 갇히지 말고 도덕이나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초자아인 슈퍼 에고(Super ego)를 발휘해야 한다. 이래야 인간 문제나 인간 문제에서 비롯되는 사회병리 현상의 치유책을 탐색하는 노력이 인간 내면과 밖에서 동시에 이루어져 좀 더 효율적이고도 조화로운 성과를 낼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주장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북의 핵위협에 맞서는 고고도미사일방어(사드, THAAD)체계 설치에 반대하는 주민 설득에 나선 언필칭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국무총리와 고위 중앙 및 지방 정부 관계자들이 주민들이 조성한 아수라장 속에서 한동안 감금되고 봉변당하는 일이 있었다. 정부의 소통 노력이 부족한 가운데 취해진 갑작스런 조치가 주민들을 충격에 빠뜨린 탓을 간과할 수는 없지만 그 현장은 목불인견의 완전한 무법천지였다. 이를 보는 우리 모두는 참담한 심정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역설적이지만 그 광경을 보고서 그런 참담한 심정, 말하자면 사회 골조가 무너지는 그런 우국(憂國) 우민(憂民)의 심정을 느낀 국민이 많았다면 그건 우리에게 아직 희망이 많이 남아있음을 의미한다. 어쨌거나 국민 전체로는 안보와 안전이 담보되는 ‘행복의 조건’이 국지적(local)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불행의 조건’이 되는 이 이율배반은 너무나 안타깝다. 정부가 주민과 농작물에 무해(無害)한 대책을 마련할 수 있다면 모두가 냉정해져 분위기를 가라앉힘으로써 국민적 유대를 회복하고 대내외에 엄숙한 우리의 안보 결의를 천명할 수 있어야 한다. 한편으로는 주변 강국들과 북의 눈치를 살펴 쭈뼛거리면서 허약하게 내홍(內訌)에 빠지고 우리의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행동과 안보적 조치를 취하는 데 망설이는 기회주의 내지 심약한 패배주의로는 우리의 행복을 지켜내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티끌과 먼지로 가득한 이 풍진 세상을 구제할 수도 없다. 국가의 안위와 개인의 행복은 절대로 별개가 아니다. 역사적 시련에 연단된 우리 국민은 절대로 그걸 모를 국민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면서 횡설수설을 마무리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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