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한 사인(私人)이 세상을 떠난 것에 대해 그 사람 나라의 대통령 부부가 추도 성명을 냈다면 그는 사인이 아니라 최고의 공인(公人)이라 해야 마땅하다. 더구나 유엔 사무총장까지 추도 성명을 냈다면 그는 세계 최고의 공인이자 세계 시민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의 나라 대통령과 유엔 사무총장이 낸 애틋한 추도 성명의 대상이 된 사람은 다름 아닌 2016년 6월 3일 세상을 떠난 미국의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다. 바로 세기적인 전설의 박서(boxer)다. 기실 알리의 일생이 전설적인 것이었지만 그의 죽음에 그의 나라 대통령은 물론 유엔 사무총장까지 나서 추도 성명을 발표한 것 역시 길이 남을 전설이 되고도 남음이 있을 일임에 틀림없다. 미국 언론들은 그의 죽음을 긴급뉴스(Breaking news)로 상세히 다루거나 대서특필하는데 추호의 주저함도 없었다. 이만 하면 생전에 자신을 자화자찬하며 ‘The greatest(가장 위대한 사람)’라 떠벌였다 해서 비웃음을 던졌던 사람들도 알리의 일생을 새롭게 재조명해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미국의 첫 흑인 대통령 오바마 부부는 부부 공동성명에서 “무하마드 알리는 세상을 뒤흔들었으며 세상은 그로 인해 더 나아졌다”고 했다. 이 은유(metaphor)적인 얘기의 의미를 더듬어 보자면 알리의 일생을 흑백 차별 철폐와 민권 운동을 위해 가시밭길을 걸었던 미국의 마틴 루터 킹이나 남아공의 넬슨 만델라의 그것과 비유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아마 알리를 그 ‘위인들’에 비유한 은유적인 함축성 속에 자신도 들어있다고 오바마가 굳이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내심으로는 그 자신을 포함시켰을 수도 있다고 상상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한편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알리의 죽음에 대해 추도하기를 “알리는 평등과 평화의 세계 챔피언이었다. 그는 원칙에 대한 사랑과 재치, 우아함을 무기로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싸웠으며 이런 강점을 활용해 인류를 더 높은 곳으로 이끄는 것을 도왔다”고 했다. 이는 알리가 생전에 유엔에서 평화메신저로서 활동한 것은 물론 흑백 차별을 말하는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와 인종차별을 반대하는 운동을 활발히 펼쳐온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세계 최고 지도자들인 이들은 이처럼 보통 사람은 언감생심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최상의 찬사들을 쏟아내었다.   

이로 미루어 본다면 알리의 일생이 주먹으로 결정되는 사각 링(ring) 위의 챔피언이나 단순한 주먹잡이 투사(鬪士)로만 사람들에게 각인되는 것으로 끝났다면 이렇게 입체적이고 다면적인 찬사는 결코 들을 수 없었다고 봐야 한다. 물론 그는 완벽한 사람은 아니었다. 더구나 겸손과 과묵의 미덕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그는 말 많고(talkative) 시끄러운(vociferous) 사람이었다. 특히나 그는 운동 경기 전에 상대 선수의 골을 지르거나 신경을 거스르게 하고 모욕을 가하는 이른바 ‘트래시 토킹(trash talking)’의 명수였다. 그가 1974년 조지 포먼과 헤비급 경기를 치르기 직전 “나비처럼 펄펄 날아서 벌처럼 쏠 것이다. 하지만 네 손은 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칠 수 없다(Float like a butterfly, sting like a bee, your hands can’t hit what your eyes can’t see)”라고 한 것 역시 지금도 회자되는 유명한 ‘트래시 토킹’ 중의 하나다. 아마 ‘트래쉬 토킹’을 하는 ‘트래쉬 토커(trash talker)’로서 알리의 뒤를 이을 만한 빼어난 인물은 앞으로 더는 나오기 쉽지 않을 것으로 봐진다. 더 말할 것 없이 알리는 링 위의 ‘투사’였을 뿐만 아니라 링 밖에서도 또 다른 의미의 ‘투사’였다. 링 위에서 주먹의 맞수에 강펀치를 퍼붓듯 링 바깥세상에서도 자신의 신념에 따라 ‘차별’과 ‘불의’의 세력에 거침없는 공격을 퍼부었다. 미국의 인권운동가 재시 잭슨 목사는 그런 그를 ‘영웅’이라 했다. 

그는 12살에 권투를 시작해 18세 때인 1960년 로마올림픽에 라이트 헤비급 미국 대표선수로 출전해 금메달을 땄다. 하지만 의기양양해진 그를 향해 갱(gang)들은 조롱하고 협박하며 식당은 그가 흑인이어서 입장도 시키지 않고 밥을 팔지 않았다. 이에 화가 치민 알리는 그 금메달을 아무 의미 없는 쓰레기 버리듯 강물에 투기해버렸다. 그런 후 프로로 전향해 1964년 2월 당시 세계 헤비급 챔피언 소니 리스트와 세기의 대결을 펼쳐 7라운드에 TKO 승을 거두었다. 이렇게 그가 일생동안 치른 눈부신 통산 전적은 61전 56승 5패다. 그가 링을 떠난 것은 39세 때인 1981년이다. 특히 그는 유일하게 3번에 걸친 WBA와 WBC의 진정한 통합 세계 챔피언 벨트를 거머쥐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흑인인 그의 일생은 숙명적으로 차별에 대한 저항과 투쟁, 자유 평등에 대한 갈망, 굽히지 않는 신념으로 결코 순탄한 것이 아니었다. 정당성 측면에서 전연 시비가 없지는 않으나 그가 1967년 베트남전쟁의 참전과 그것을 위한 정부의 징집을 거부해 실형을 선고 받고 3년이나 챔피언 자격을 박탈당한 사건도 그런 일 중의 하나다. 그의 말은 이러했다. “베트공은 나를 검둥이라고 놀리지 않는데 내가 왜 그들에게 총을 쏘아야 하느냐. 흑인이라는 이유로 이 나라에서 누리지 못하는 자유를 남이 누리도록 싸울 수는 없다”고 항변했었다. 그가 농장 노예였던 자신의 조부 이름을 그대로 따라 지은 원래 이름 캐시어스 마르셀러스 클레이 주니어(Cassius Marcellus Clay Jr.)를 무하마드 알리로 개명한 것도 그 이름이 백인인 농장주인이 노예인 조부에 부여한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그 같은 이슬람식 이름에서 진정한 영혼의 자유와 안식을 얻는 듯 보였었다. 

그가 권투를 시작한 것도 가난 때문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 잃어버린 자전거를 찾아달라며 찾아간 경찰서 어느 형사의 ‘권투를 해 도둑을 혼내 주라’는 권고를 듣고 바로 권투에 입문한 것이 그 동기였다. 그게 12살 때다. 알리는 1942년 흑백 차별과 흑인 천대가 미국에서도 심하기로 유명했던 켄터키주 루이빌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집이 밥을 굶을 만큼 가난하지는 않았었다. 파란만장은 했지만 요란하고 화려한 일생을 살고 그의 죽음에도 현란한 추도와 애도가 쏟아진 그런 알리의 영혼은 소리 없고 보이지 않는 나비의 율동으로 저승 어딘가 새 세상을 향해 간 것 같다. 그는 파킨슨병을 앓았다. 긴 투병으로 74년을 산 데 불과하다. ‘투사’나 ‘영웅’이라 해도 인간은 생로병사(生老病死)의 굴레를 못 벗어난다. 초로(草露) 같은 인생이라니-. 누구나 이렇게 끝이 헛되고 허망하게 되는 것을 피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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