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상현 주필

 

누구 앞에서 이런 꼴을 보이는가. 필시 국민을 우습게 본 것이지. 며칠 전 느닷없는 기자회견에 몸을 드러내었던 ‘친박(親朴)’계 인사들의 숫자가 20명이라 했던가. ‘떼’를 지어 모습을 드러낸 그들은 이른바 ‘친박’의 신예 결사대 아니면 무슨 친위대와도 같았다. 이랬다. 4.13 총선 참패에 책임을 느껴 당 대표가 물러난 새누리당의 지도부는 공백 상태였다. 한 순간이라도 국정을 뒷받침하는 집권당이 이런 모습을 보이면 백번 무책임하단 소리를 들어도 싸다. 망연자실하던 끝에 간신히 정진석 원내대표를 뽑아 전당대회 준비와 혁신위원회를 꾸리게 한 것은 약간 타이밍은 지체됐을지라도 주목을 끌기에는 조금도 모자람이 없었다. 솔직히 그가 국민에 대해 몸을 낮추며 뚝심을 보이고 의욕을 불태웠기에 이제는 뭔가 제대로 돼가나 싶었다. 

그런데 평지에 돌풍이 일 듯 결사대인가 친위대인가를 앞세운 ‘친박’ 세력이 그를 사정없이 흔들어 마음에 외상(trauma)을 입힐 만한 좌절을 안겼다. 친박의 응원에 힘입어 원내대표가 된 정진석 대표가 그 공을 저버리고 비대위와 혁신위의 구성원들을 친박이 경계하는 강성 인사를 포함해 비박(非朴) 인사 중심으로 꾸리려 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들은 불쑥 나타났다. 먼저 기자회견을 열어 그 같은 비박 일색의 인사 백지화를 요구하더니 급기야는 황당하게도 인사의 심의 의결을 위해 열린 상임전국위와 전국위를 무산시켰다. 정진석 대표는 그것을 ‘자폭 테러’라 했다. 기실 그렇다. 이런 행위는 친박 비박을 가릴 것 없이 코미디 드라마와 같았던 ‘진박(眞朴) 마케팅’이 새누리당에 총선 참패를 안겨주었던 것만큼이나 그들 모두에게 불행을 안기는 막 가는 행위인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왜 이런 미련한 짓을 했을까. 이거다 저거다 딱 짚어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얼추 이런 저런 상상을 해보는 것은 가능할 것 같다.  

그들은 중진 반열에 들 만한 다선(多選) 경력자들은 아닌 것으로 파악됐다. 그렇다면 그들은 윗선과 소속 계보에 대한 뜨거운 ‘단심(丹心)’을 그 누구보다도 더 참신하고 나이브(naive)하게 드러내 보여줄 좋은 기회를 잡았다는 생각에서 행동한 것은 아니었을까. 뿐만 아니라 그들은 그들이 누리던 기득권으로서 지금은 흔들리는 당 헤게모니(hegemony)를 사수하기 위해 충동적으로 열혈 행동에 나섰던 것은 아니었을까. 혹여 그 같은 행동들이 보이지 않는 거물 실세들의 기획이나 조종 또는 암묵적이고 은근한 동의하에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고 장담할 수는 있는 것인가. 하도 납득이 가지 않는 성급하고 기이한 ‘일’인 셈이어서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르는 별의 별 상상들을 주체하기가 어렵다. 그것은 더 말할 것 없이 새누리당의 당면 지상과제인 ‘혁신’을 거스르는 반란이며 반동이고 해당행위이다. 

더구나 그것이 얼토당토않게 조급한 행동이었던 것은 새로 만들어지는 기구들에서 내놓을 어떤 산출물도 보지 않고 ‘그들 구성원들이 비박이어서 친박에 위해가 된다’는 식으로 막연한 의심과 적의(敵意)를 드러내고 그것을 때 이르게 행동화했다는 점이다. 이런 불신과 의심으로는 두 계파가 한 배를 타고 갈 수 없다. 가진 것을 비우고 내려놓고 ‘읍참마속(泣斬馬謖)’과 같은 고통을 감내해도 될까 말까한 혁신 작업을 원활히 이루어내기 어렵다. 정진석 대표가 일찍이 원내대표단을 ‘친박’ 중심으로 꾸렸을 때는 ‘비박’에서 정 대표가 ‘친박의 대리인에 불과한 것 아니냐’며 들고 일어났었다. 이런 십자포화 속에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이렇게 두 계파가 사사건건 첨예하게 대립하다 보면 지금의 ‘친박 비박’의 연성(軟性)적인 갈등은 자칫 ‘친박 반박(反朴)’의 화해할 수 없는 극단적인 대치로 비화돼 융화와 동거가 불가능한 지경에 빠져버릴 수도 있다. 어떤 사안을 놓고 서로 간에 사전 경고나 다소 격렬한 언사의 교환은 있을 수 있으나 ‘친박’이 상임전국위와 전국위를 무산시킨 것과 같은 계획적인 류(類)의 처사는 자유민주주의 공당(公黨)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은 폭력이다. 이에 대해 새누리당의 많은 의원들 스스로가 입에조차 담기 어려운 험한 비판을 주저 없이 쏟아내고 있는 형편이다. 과연 이런 모습을 삐딱한 눈으로 새누리당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피는 국민들에 보여주어 되는 것인가. 물론 그들이 ‘단심’을 드러내 보이고자 했던 윗선 누구에게도 도움 되는 일이 아니다. 혁신을 지향하는 새누리당이 지금 필요로 하는 것은 윗선에 대한 ‘단심’ 보여주기 경쟁이 아니라 국민에 대해 경쟁적으로 충성을 보여주는 발상과 그 같은 시스템으로의 획기적인 전환이 절박한 때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세월호 사건이 났을 때 팽목항에서 오로지 ‘위민일심(爲民一心)’의 지성(至誠)을 다해 유족들과 국민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함으로써 정권의 위기를 맨몸으로 막아냈던 당시 해수부 이주영 장관과 같은 무한 책임 정신과 진솔성을 국정 책임이 있는 새누리당은 마땅히 보여주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혁신을 한다면서 당의 단합을 해치거나 당을 깨면 혁신의 의미는 퇴색될 것이다. 천지를 뒤바꾸어 놓는 것처럼 계파의 위상을 뒤죽박죽 만들어 놓아 불화의 골을 메울 수 없게 만들어 놓는 것도 바람직한 혁신은 아니다. 그렇다고 ‘그릇을 깰까봐 장독대의 쥐에 돌을 던져 잡기를 두려워하는 것(投鼠忌器/투서기기)’처럼 맥 빠지게 혁신 작업을 끌고 가서도 국민들로부터 호되게 비난 받기 십상이다. 윗선에 대한 ‘단심’이 아니라 국민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는 것이 원론적으로 옳은 말이기는 하나 막강한 현실 권력인 대통령 권력이 뿌리를 두고 있는 집권당의 특성을 무시하기도 어렵다. 막상 이렇게 혁신이라는 창을 통해 들여다보는 총선에서 참패한 집권 새누리당의 속사정은 풀기 어려운 ‘모순(矛盾)’과 ‘딜레마(dilemma)’로 가득하다. 이 모순과 딜레마를 통 크게 풀 수 있는 단 한 사람, 그는 알렉산더 대왕이 고르디우스 매듭(Gordian knot)을 단칼에 베어 버렸듯이 실질적으로 당을 장악하고 있는 대통령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임기말의 대통령은 적어도 당을 장악하려 애쓸 것이 아니라 당이 고도의 자립, 독립, 자율에 의해 돌아가도록 편하게 풀어주어야 옳을 것 같다. 왜냐. 권력 재창출의 가능성은 임기가 끝나가는 대통령이 아니라 뼈아픈 혁신으로 면모를 일신해 국민에게 가까이 다가간 당이 주도권을 잡고 노력할 때 더욱 농후해질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이 어찌 굳이 꼭 새누리당에만 국한되는 충고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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