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무릇

이잠

 

지나갈 테면 빨리 지나가라 했지요 한참이
지난 뒤에도 그 자리에서 꿈쩍 않네요
머무를 테면 머물러 봐라 했지요 마음은
지천으로 흘러흘러 붉게 물들이대요
내가 그대에게 갈 수 없고
그대가 나에게 갈 수 없어도
꽃은 피었습니다

천지에 그대라 눈에 밟힙니다

 

[시평]

식물들 중에는 상사화류(相思花類)의 꽃이라는 것이 있다. 이파리가 시들어서 져야만이 꽃이 피기 때문에,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하므로, 그 꽃과 잎이 서로 그리워한다는 뜻에서 ‘상사화’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꽃들. 꽃무릇은 일명 석산화라고도 하는 수선화과에 속하는 알뿌리식물이다. 이 꽃무릇이 바로 상사화류의 하나이다. 서로를 서로가 그리워하는 꽃.

선운사 산골짜기에 이 꽃무릇의 알뿌리가 장마 때면 계곡을 따라 흘러내려와서는 물가의 둔치나 평평한 곳으로 흩어지기 때문에, 흩어져 그 자리에 뿌리를 내려 꽃들이 피기 때문에. 이 덕분에 가을이면 계곡 전체가 붉은색으로 채색이 된다. 

그러나 어디 선운사 골짜기뿐이랴. 꽃무릇은 이렇듯 지천으로 흘러흘러 붉게 물들이는 것이 그 속성. 마치 나를 떠나간 그대 마냥, 그래서 온 천지 눈에 밟히는 그대 마냥, 한참이 지난 뒤에도 그 자리에서 꿈쩍 않고, 흘러흘러 마음에 피어나는 붉디붉은 그대. 오늘 저 온 천지, 상사(相思)의 꽃무릇으로 마음 속 그득, 다시 피어나고 있구나.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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