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캄절벽

박희진(1931 ~ 2015)

잠속에서 시를 세 편이나 탈고했다.
웬일이여, 이 밤중에! 세 편이나 횡재하다니.
하지만 일어나 소변을 보았더니 빠져나간 모양.
이젠 아무런 생각이 안 난다. 캄캄절벽이다.

[시평]

시인에게 가장 큰 횡재는 다름 아닌 좋은 시를 많이 쓰는 것이다. 시가, 아니 좋은 시가 바로 시인의 가장 큰 재산이기 때문이다. 재물이 아닌, 명예가 아닌, 다만 시가 재산이 되는 사람. 참으로 멋있지 아니한가. 

그 재산을 갑자기 세 편씩이나 얻었으니, 이거 참으로 횡재가 아니고 무엇이랴. 너무나 좋아서 싱글벙글 가슴이 다 뛰는데, 그만 요의(尿意)를 느끼고 깨어나니 꿈 아닌가. 그래도 꿈에서 쓴 그 시들, 잊지 않으려고 잔득 고의춤을 붙들고 부지런히 화장실로 달려가 얼른 소변을 보고, 꿈속에서 쓴 시를 옮겨 놓으려 하는데. 그만 소변으로 꿈속의 시들, 모두 빠져 나간 모양이다. 돌아와 책상에 앉아 아무리 끙끙대며 꿈속에서 쓴 시들을 기억해 내려고 해도 캄캄절벽. 

꿈에서까지 시를 쓰는 시인. 한 생애를 시만을 위하여 살다간 시인. 어떤 재물보다도, 어떤 미인보다도, 어떤 명예보다도 더 애지중지한 시. 그 시를 위해 시인은 지금 비록 육신은 버렸어도, 골똘히 시를 찾아 오늘도 천지 모두를 헤매고 있지 않을까.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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