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번호 지우기
이경우

나는 오늘 스마트폰에서 사촌 아우의 전화번호를 지웠다
손가락 한 번 터치로 사라지는 숫자처럼
한마을에서 나고 살아온 반세기
그와의 애환이 쉬이 지워질 수 있으랴만
이제 그를 놓아주는 것이 그의
영면을 위한 작은 배려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가 잠든 곳은
그 어떤 애원이나 절규도 닿지 않아
한없이 고적하겠지만
여기는 아직도 구해야 할 근심이 많아
여전히 소란스럽기만 하다

나는 오늘도 하릴없이
근심을 구하러 문밖을 나서는 중이다.

[시평]

전화기 안에 내장된 전화번호들을 보다가, 지금은 유명을 달리한, 그래서 이 지상에 없는 사람의 이름을 발견할 때가 더러 있다. 그 사람은 이제 전화를 걸어도 받을 수 없는, 그런 곳으로 갔는데, 내 전화기 속에는 그 사람의 이름과 전화번호가 아직 남아 있었구나.

손가락 한 번의 터치로 간단하게 지워버릴 수 있는, 그러나 그렇게 지워버리는 것이 안쓰러워 아직도 지우지 못한 이름과 전화번호. 그 사람, 이제 그를 놓아주는 것이 그의 영면을 위한 배려라고, 지워버린다.

그러나 비록 그 사람 이름은 지웠지만, 결코 지워지지 않는 그와의 애환. 한 번의 터치로 그 사람, 어떤 애원도 절규도 닿지 않는 곳으로 보냈지만, 그래서 그를 근심도 소란도 없는 자리로 보냈지만. 오늘도 여전히 그를 놓아주지 못한 채, 근심을 구하러 문밖을 나선다.

 
윤석산(尹錫山) 시인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관련기사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