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승역에서 나는 들었다

홍신선(1943~ )

흰 노트에 눌러 쓴 연필글씨들 지우개로 빡빡 지우면 휑뎅그렁한 본바탕 누런 종이가 낡은 유령처럼 다시 튀어나온다고

소형유골함에 착착 큰 허우대 접어 넣고 말끔히 나를 지우면 접속노선 환승하듯 무한으로 이에 빠져나온다고, 죽어서야 사람은 다시 영원의 긴긴 노선을 갈아탄다고 유유한 큰 자연으로 살아간다고

나는 들었다
내 안의 텅 빈 어느 환승역에서

[시평]

삶을 살아가다 보면, 마치 환승역에서 새로운 열차를 타는, 그러한 때와 같을 경우가 있다. 예컨대 청소년기에 맞이하는 사춘기가 바로 이러한 때요, 또 중년 이후에 맞이하는 갱년기가 바로 이러한 때가 된다. 그런가 하면, 힘든 병치레를 하고 난 이후의 삶이 마치 환승역에서 새로운 열차를 타고 새로운 구간으로 이동하는 것과 같은 때이기도 하다. 지금까지의 삶과는 다른, 마치 새로운 열차를 갈아타듯이, 그래서 낯선 구간으로 이동하듯이 몇 차례씩 삶의 환승열차를 갈아타며, 우리는 삶이라는 구간을 살아간다.

이렇듯 삶의 전환기에 이르러, 그래서 새로운 열차로 갈아타고 새로운 구간으로 이동하듯 살아가게 되면, 간혹 삶이란 과연 얼마나 오래 이어지는 것인가, 한번쯤 생각해 봄이 일반이다. 그런가 하면, 삶이란 과연 무엇인가, 본원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보기도 한다. 그러므로 지금까지는 알지 못하던 새로운 삶의 모습 또한 발견하게 되는 것, 역시 이 삶의 환승역에서가 아니겠는가.

우리가 살아가며 구간, 구간 만나게 되는 사춘기라든가, 갱년기, 또는 힘이 든 병치레 등은 다만 내 삶의 구간일 뿐만 아니라, 내 삶을 새롭게 돌아보고, 삶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그러한 계기를 마련하는 새로운 시간이도 하다.  
윤석산(尹錫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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