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칼럼니스트

‘유쾌, 상쾌, 통쾌’ 이 세 단어는 언젠가부터 하나의 세트로 묶여 쓰이고 있다. 세 단어가 줄줄이 사탕처럼 따라 붙는다. 당연히 그래야 될 것 같고, 입에도 짝 붙어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요즘은 이 단어 조합이 어느 약 광고에 등장하고, 그래서 더욱 익숙해졌다.

유쾌, 상쾌, 통쾌, 이 단어가 한 세트로 쓰인 것은 오래 전 일이다. ‘행복, 그거 얼마예요?’ 등의 책과 강연을 통해 행복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던 최윤희 씨가 만들어 쓰면서 유행이 됐다. 그는 스스로 ‘행복전도사’라는 별명을 짓고, 행복의 비결에 관해 역설했다. 유쾌 상쾌 통쾌하게 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 인생이라는 게 참으로 기묘하고 아이러니한 것이, ‘행복 전도사’ 자신은 행복하지 않은 듯 했다. 어느 날 그가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는 뉴스가 나왔다. 사람들은 놀랐다. 행복 전도사가 왜, 무슨 까닭으로 그런 안타까운 선택을 한 것일까. 그는 병마와 싸우고 있었고 고통을 끊기 위해 목숨을 끊었다는 사연이 소개됐다.

실제로 그는 정 많고 따뜻한 사람이었다. 만나 보면, 책이나 강연에서는 다 보여주지 못했던 진솔하고 다정한 심성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기를 진심으로 원했고, 진심으로 책을 쓰고 강연을 했다. 많이 베풀었다.

얼마 전에는 유명한 소통 전문가가 알츠하이머 증세를 겪고 있다고 고백했다. 청중들을 웃기고 울리며 박수 받고 사는, 행복하게 사는 게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에게 그런 시련이 닥쳤다니, 의아하고 기묘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고민을 들어주고 해결해 주는 영혼의 치료사가 그런 병을 얻었다고 하니, 부조리하고 비현실적이다.

우리네 삶이라는 게 그렇다. 제 뜻대로 되는 게 별로 없다. 계획대로 살아지는 것도 아니다. 성공한 사람들은 남들보다 더 많이 노력하고 고난을 견디는 남다른 정신력을 가졌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그들보다 몇 곱절의 더 많은 노력을 하고 몇 십 배 더 한 고통을 이겨냈음에도, 성공은커녕 절망의 늪에 빠져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도 많다. 그게 인생이고 우리들의 한계다.

‘정의 사회 구현’이라는 모토를 내걸고 세상을 짓눌렀던 시절이 있었다. 불순하고 사악한 자들은 정의 사회를 만들겠다며 정의를 짓밟았다. 천만 관객을 눈앞에 두고 있는 영화에서 그려지고 있는, 부조리하고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빚어낸 우리들의 자화상이다.

정의사회 구현을 외쳤지만, 정의는 없었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참으로 우울하고 절망적인 세상이었다. 안 되면 되게 하라며 밀어붙이고,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며 힘없는 사람들을 가스라이팅 했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한 자들은 성공한 자들이었고, 안 되는 것을 안 된다고 한 자들은 패배자들이었다. 그런 시절이었다. 야만의 시절이었다.

야만의 시간은 그러나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현재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 총칼로 권력을 찬탈하는 대신 거짓과 날조, 선동과 조작으로 진실을 비틀고 사실을 왜곡하여 부당하게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일들이 세상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

정치판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아이들의 미래가 달려 있는 교육 현장에서도 그렇다. 상장과 경력이 조작되고, 출세한 자들이 자식들의 위조 인턴십을 위해 품앗이를 한다. 의사와 미래의 의사들은 엄동설한에 거리로 나서고, 입시에 실패한 아이들은 좌절한 채 제 방문을 걸어 잠근다.

부조리하고 부당한 경쟁이 우리들을 우울하게 한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여 성공한 자들은 영화 속 전두광처럼 오줌을 갈기며 웃고, 그렇지 못한 자들은 모진 북극의 겨울바람이 더욱 아리고 슬프다. 누가 우리를 우울하게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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