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칼럼니스트

거리에서 유모차를 만나게 되면 어떤 아기가 타고 있을까, 들여다보게 된다. 아기들을 보면 더없이 반갑고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속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유모차에, 아기 대신 개가 들어 앉아 있을 때 그렇다. 엄마가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산책을 나온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에 고개를 빼고 들여다보지만, 깜빡 속고 만다.

예전에는 동네 골목마다 아이들 웃고 떠드는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골목은 아이들의 놀이터이자 공부방이었다. 시끄럽다며 까탈을 부리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개는 그런가 보다 했다. 아이들은 그렇게 어울려 놀면서 협동심도 배우고 이웃 간 정이 무엇인지도 깨달았다. 어릴 적 골목은 그래서 늘 따뜻한 기억으로 남아 있다.

아이가 많으면 셋방살이도 힘들었다. 셋방을 얻으러 가면 으레 아이들이 몇이냐 물었고, 아이가 많다 싶으면 세를 주지 않았다. 그래, 할 수 없이 아이 숫자를 줄여 말하기도 했다. 멀쩡히 잘 살다가도 아이들이 많다는 이유로 쫓겨나는 일도 있었다. 고단한 삶이었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아이를 낳았고, 그 또한 복이라 여기고, 헌신하고 땀 흘리며 살았다.

다 옛날이야기다. 이제는 골목에 아이들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아파트에도 주택가에도, 시골에도 도시에도 아이들 소리 듣기가 힘들어졌다. 유모차들이 거리를 돌아다니지만, 웬만하면 개들 차지다. 엄마다, 아빠다, 소리를 질러대는 곳을 보면, 개가 깡충거리고 있다.

비오면 비 맞을세라, 눈 오면 눈 맟을세라, 바람 불면 감기 들세라, 강아지에 대한 애정이 참으로 대단하다. 가히 반려견의 민족이라 해도 틀리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사람이란 어디 정을 붙이고 살아야 하는데, 집안에 정 쏟을 아이들이 없으니 강아지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다. 강아지 원망할 일도 아니고, 사람 원망할 일은 더욱 아니다. 강아지도 어엿한 식구로 인정받고 대우받는 세상이다.

어느 아파트 할 것 없이 아이들 소리는 안 나도 개 소리는 들린다. 이쪽 집에서 왈왈, 하면 저 건너 집에서 멍멍, 한다. 아이들은 큰 소리를 내거나 마음대로 뛰어다니지도 못한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난리를 피우는 고약한 이웃들 때문이다. 죄 없는 아이들은 목소리를 죽이고 까치발로 걸어 다닌다. 어린 아이 가진 부모들은 늘 불안하고 초조하다. 내 집에 살면서, 죄인처럼 숨죽이고 살아야 하는 현실이 고약할 따름이다.

황순원은 소설 ‘꿈 많은 시절’에서 개가 짖는 세 가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개가 몸을 피하면서 짖을 때엔 밖에 이리 같은 짐승이 있을 경우’ ‘개가 한끗만을 향해 짖어댈 땐 낯선 사람이 그 방향으로 오는 경우’ ‘개가 엎딘 채 고개만 들어 한번 컹컹 짖고 잠잠하고 말 땐 이웃의 아는 사람이 오는 경우’가 그것이다.

작가는 이런 개의 짖음이 몽골에서 나온 말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개들도 다르지 않다. 예전부터 몽골 풍속이 많이 전해져 왔다는 걸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다. 요즘 개들은 이리 같은 짐승을 만날 일도 없고, 낯선 이웃을 경계할 일도 별로 없다. 자신도 사람인 냥, 주인과 더불어 한 침대에서 자고, 같이 먹고 더불어 논다.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따로 있지 않은, 오묘한 세상이다.

시인 김기림은 ‘안개의 해저에 침몰한 마을에서는 개가 즉흥시인처럼 혼자서 짖는다’고 했다. 더불어 살 부비고 놀아주는 상대가 마땅찮아 심심했을 개가, 안개 자욱하고 적막한 마을에서 혼자 컹컹 짖고, 시인은 그것이 시인이 시를 짓는 것 같다고 한 것이다.

고요한 가운데, 개 짖는 소리를 듣는 것도 운치가 있지만, 아이들 웃는 소리, 옹알거리는 소리만큼 행복한 소리도 없다. 낳고 기르는 것이 고단하고 힘들지만, 그 보람은 세상 무엇과도 견줄 수 없을 만큼 귀하고 값지다. 하지만, 보람을 위해 짊어져야 할 짐과 수고, 땀과 헌신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걸, 젊은 세대들이 알아버렸다. 인정과 도리, 사랑과 희생 대신 가성비를 먼저 따지는 세상이 되었다. 힘든 세상이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