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경우 칼럼니스트

정치인들의 출판 기념회 소식이 자주 들린다. 그 바쁜 가운데 책까지 내다니, 참으로 훌륭한 사람들이구나, 이런 생각이 들면 얼마나 좋을까. 근무 시간에 코인하고 주식하면서, 원고 쓰고 책을 내고 출판기념회 이벤트까지 여는 것 보면, 예사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 빼어난 재주가 있으니 금배지도 달고 높은 자리에도 오를 수 있었겠지만, 보통 사람들 눈에는 경이롭기까지 하다.

선거 때만 되면 출판기념회가 줄을 잇지만 읽을 만한 책이 나왔다는 이야기는 없다. 서점에 내다 팔 것도 아니고, 누구로부터 평가를 받을 것도 아니고, 그저 출판 기념회를 위한 구실로 만들어진 것이라, 알맹이 없는 헛껍데기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저자가 제힘으로 연구하고 자료 뒤지고 원고를 쓰는 경우도 거의 없다. 십중팔구 누군가 대신 써 주는 원고에 자신의 이름만 얹은 사이비 가짜 책이다.

선거철이 다가오면 고스트 라이터, 즉 이름을 밝히지 않고 원고만 써 주는 유령 작가들과 선거 후보자 측의 만남이 이뤄진다. 원고지 분량과 내용 등에 합의하고 집필을 한다. 출판사도 섭외한다. 그런데 작가나 출판사들이 원고료와 책 제작비용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선거에 지면 재수 없다고 안 주고, 당선되면 기다리라 하고서는 얼렁뚱땅 넘어간다. 작가나 출판사는 어디 가서 말도 못 하고 결국 포기하고 만다. 그렇게 사기를 당하는 것이다.

우리는 예전부터 책을 귀하게 여기며 살아왔다. 남아수독오거서(男兒須讀五車書)라 하여, 무릇 남자란 다섯 수레의 책을 읽어야 한다고 배웠다. 다섯 수레의 책이면 엄청난 양이다. 지금의 책 분량으로 치면 몇천 권은 될 것이다. 하지만 종이가 귀하던 아득한 시절, 대나무 등에 글을 써 책으로 삼았으니 그 부피가 상당했을 것이므로 지금의 책 분량과 비교하면 안 될 것이다. 컴퓨터 콘텐츠로 치면 더더욱 비교가 안 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인생의 중요한 덕목이었다. 주경야독(晝耕夜讀)이라 해서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책을 읽으라 했다. 어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책을 놓지 말라는 것이었다. 형설지공(螢雪之功), 즉 반딧불과 문밖에 쌓인 눈에 의지해 공부하라는 것도 같은 의미다.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며 책 읽기를 권하였다. 그렇게 가르치고 배우며 살아왔다. 오늘날 우리가 이만큼 살게 된 원동력이자 밑거름이 곧 책에 대한 애정이었다.

흔들리는 지하철에 몸을 맡긴 채 차분하게 책을 읽던 모습이 보기 좋았던 시절이 있었다. 지나간 이야기다.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제, 시대를 쫓아가지 못하는 뒤처진 사람처럼 보일까, 망설여지기도 한다. 종이책의 유용함이 여전하지만, 그럼에도 공공장소에서 책을 읽는 것이 어색한 세상이 된 것은 틀림없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이나 선홍빛 단풍잎을 책갈피에 끼워 계절의 향기를 담던 시절도 있었다. 이것도 옛날이야기다. 책장 사이에 나뭇잎을 넣어둔 것은 곰팡이를 막기 위해서였다. 서고의 책들을 바깥에 꺼내어 바람에 말리던 거풍(擧風)과 같은 이치다.

책갈피 속에 간직한 가을날의 잎들, 차를 마시며 책을 읽는 조용한 카페, 선물로 받은 책에 어린 사연과 추억들. 책과 관련된 풍경들은 하나같이 사람의 마음을 정갈하게 만든다. 안중근 의사는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생긴다”고 했다. 책은 사람의 마음을 다듬고, 말을 다듬어, 인간을 비로소 인간답게 해 준다.

정치인들의 출판 기념회, 북 콘서트에는 책의 향기나 보약 같은 글귀와 말 따위는 찾아볼 수가 없다. 탐욕으로 이성이 마비되고, 원칙과 상식, 염치와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자들의 막말과 아무 말 대잔치가 벌어지는, 통제 불능의 야바위판이다. 말 같지도 않은 말을 하면서 그들끼리 시시덕거린다.

남의 눈에 피눈물 나게 해놓고선, 제 눈의 눈물을 닦아 달라며 억지를 부리고, 법을 어겨 죗값을 받고서도 명예를 되찾겠다며 결기에 찬 모습으로 앞머리를 휘날린다. 잊히고 싶다는 사람을 찾아가 포옹을 하고, 두 주먹을 쥐고 기념사진을 찍기도 한다. 어색하고 기이한 풍경들이 책을 통해 펼쳐지고 있다. 사람이 책을 만들고, 책이 사람을 만든다고 했다. 누가 책을 만들고, 책은 누구를 사람으로 만들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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