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준 역사연구가/칼럼니스트

‘매란국죽(梅蘭菊竹)’을 사군자라고 부른다. 찬 겨울을 맞아도 푸른 자태를 잃지 않는 것이 군자의 의기와 같다고 붙인 이름이다. ‘난은 천리까지 향기를 퍼뜨린다(蘭香千里)’는 말이 있다.

조선 최고의 명필인 완당 김정희 선생(1786~1856)과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 ‘난(蘭)’이 아닌가 싶다. 난을 완당은 매우 애호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난을 즐겨 그려 돌리지 않았다. 완당은 평소 자신의 글씨를 부탁하는 이들에게 잘 써 주었지만 묵난 만큼은 인색했다.

완당집을 보면 “난을 그리려면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 문자의 향기와 서책의 기운)’를 지녀야만 붓을 잡을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완당은 제주 적소에서 아들 상우에게 편지를 보냈다. 원나라 학자 황공망(黃公望, 1269~1354)과 명대 서화가 문징명(文徵明, 1470~1559)을 예로 들면서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그림 중에서 난이 제일 어렵다. 가슴속에 서권기(書卷氣)를 지녀야만 붓을 댈 수 있다. 산수·매죽·화훼·물고기 등을 그린 이들은 많지만 유독 난초만은 특별히 소문난 이가 없고 황공망·문징명 같은 문인화가도 난초를 잘 그리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런 어려움 때문이었다.”- 완당집, 222쪽-

아들에게 서도의 조가(祖家)인 ‘예서’ 쓰는 법으로 정성스럽게 묵란을 그리라고 했다. 완당은 그림이기보다 글씨의 연장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묵란의 매력에 빠졌던 제자 대원군이 난을 부탁할 때도 완당은 허락하지 않았다. 완당의 철저한 바람은 인격을 크게 이룬 다음 묵난을 그리라고 주문한다. 대원군에게 보낸 편지에는 금강저(金剛杵)를 잡는 자세를 주문한다.

“가슴속에 오천 권의 서책을 담는 일이나 팔목 아래 금강저를 휘두르는 일(명필이 되는 일)도 모두 여기로 말미암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략)”-추사 행서첩-

시중에는 완당의 난맥(蘭脈)을 잇는 대원군 난과 민영익의 ‘운미란’이라고 하는 작품이 많이 나돌고 있다. 그러나 진품을 찾기 힘들다.

몇 해 전 중국에서 감정학을 공부하고 돌아온 한 전문가가 국립박물관과 한 미술관이 소장한 완당 작품 위작론을 들고나왔다가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고 한다. 그는 한동안 언론의 눈을 피해 살았다는 후문도 들린다. 이런 분위기라면 어느 누가 완당 작품 진위에 대해 올바른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이번에 서울에서 공개된 완당의 ‘묵난 선면도’는 원정 민영익이 진장(珍藏, 보배처럼 소장)했던 작품이다. 민영익의 난맥을 계승한 서예가 고(故) 김용진이 ‘진품이 틀림없으며 완당의 청정한 정신에 높은 공경심을 갖는다’는 배관기를 남겨 놓았다. 지금까지 공개된 완당 묵란도 가운데 선학들이 먼저 고증한 작품이다.

묵란 선면도의 화제는 완당이 존경했던 송나라 이재 조맹견(彛齋 趙孟堅.1199-1267?)의 시구(산심일장 인정향투 山深日長 人靜香透)를 인용했다. “산이 깊어 해가 길고 인적은 고요한데 향기는 넘쳐나네”라는 뜻으로 문자향서권기를 상징하는 화제를 쓴 것이다. 이 화제를 쓴 작품이 더러 있는데 소위 ‘산심일장란’이라고 하는 작품들이다. 이는 바람을 일으키는 합죽선에 걸맞은 화제가 아닐 수 없다.

그림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삼전법(三轉法)으로 붓을 돌려 난을 그렸다. 가운데 숨은 듯 활짝 핀 농담의 난 꽃은 겸양의 덕을 갖춘 유아한 선비의 모습으로 보인다.

완당의 학문적 ‘문자향서권기’가 가득한 만년의 귀중한 선면도라서 가슴 깊이 남는다.

천지일보는 24시간 여러분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저작권자 © 천지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